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보면 다들 바삐 움직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생뚱맞습니다. 우리는 정말 바쁘게 일했는데 왜 주님은 우리더러 게으르다고 호통을 치는 것 같을까요? 과연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사업을 반드시 두 배로 키워 놓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심도깊은 관점이 필요합니다. 복음에서 언급되는 ‘일’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일과는 그 방향성과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일을 해도 하느님에게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정말 무능력해 보여도 하느님에게는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을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요? 이것에 대한 묵상이 올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바로 이 근본 질문에서조차도 서로의 생각이 갈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과연 휘황찬란한 교회 건물을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보다는 서로 하나의 뜻으로 일치하는 교회 공동체를 원하셨을까요? 물론 우리는 대충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도 그 건물도 필요한 것 아닌가요?” 라고 말이지요. 건물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것이지요. 하나의 뜻으로 일치하는 공동체가 아름다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금상첨화이지요. 하지만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다고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핵심을 망각하고 전혀 다른 것에 치중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 성전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한 말이지만, 결국 몸이든 건물이든 무너지고 말 것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미리 경고하셨지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왜 그렇게 바쁠까요? 과연 우리의 일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세상의 열매, 결국 다시 썩어버리고 말 열매를 위해서 애쓰는 것일까요? 우리는 직장 생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까요? 아니면 단순히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더 많은 이득을 내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처사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벌어들이는 탈렌트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한 생’을 맡기셨고, 우리는 그 생으로 우리 자신의 생과 더불어 다른 생을 구하는 사명이 맡겨진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을 꽁꽁 숨겨 묻어두고는 훗날 하느님 앞에 제 혼자의 삶만을 덜렁 꺼내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님은 그 동안 쌓아둔 진노의 잔을 우리에게 건네시게 될 것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30)
여기에서 심도깊은 관점이 필요합니다. 복음에서 언급되는 ‘일’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일과는 그 방향성과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일을 해도 하느님에게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정말 무능력해 보여도 하느님에게는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을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요? 이것에 대한 묵상이 올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바로 이 근본 질문에서조차도 서로의 생각이 갈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과연 휘황찬란한 교회 건물을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보다는 서로 하나의 뜻으로 일치하는 교회 공동체를 원하셨을까요? 물론 우리는 대충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도 그 건물도 필요한 것 아닌가요?” 라고 말이지요. 건물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것이지요. 하나의 뜻으로 일치하는 공동체가 아름다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금상첨화이지요. 하지만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다고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핵심을 망각하고 전혀 다른 것에 치중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 성전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한 말이지만, 결국 몸이든 건물이든 무너지고 말 것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미리 경고하셨지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왜 그렇게 바쁠까요? 과연 우리의 일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세상의 열매, 결국 다시 썩어버리고 말 열매를 위해서 애쓰는 것일까요? 우리는 직장 생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까요? 아니면 단순히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더 많은 이득을 내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처사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벌어들이는 탈렌트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한 생’을 맡기셨고, 우리는 그 생으로 우리 자신의 생과 더불어 다른 생을 구하는 사명이 맡겨진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을 꽁꽁 숨겨 묻어두고는 훗날 하느님 앞에 제 혼자의 삶만을 덜렁 꺼내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님은 그 동안 쌓아둔 진노의 잔을 우리에게 건네시게 될 것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