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되지 않는 것들은 단순히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받아도 우리는 받은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생명과 축복’은 눈으로도 감각으로도 감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것을 잃을 위기에 처할 때만이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사고가 나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받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님 상태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껏 누리던 모든 것들이 제 스스로의 능력에서 나왔다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들의 깨달음은 늘 느려 터지게 마련입니다.
내가 바이올린을 이렇게 잘 연주하니 사람들이 나에게 찬사를 던지는 것이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내가 지혜가 뛰어나서 공부를 뛰어나게 잘 했으니 당연히 좋은 직장을 얻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벌어들이는 셈이다. 이런 식의 기본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이 교만은 단순히 남보다 낫다는 수준의 교만이 아니라 ‘하느님? 그게 뭐야? 지금은 나에게 필요 없으니 꺼져버려.’라는 식의 교만입니다. 헌데 그들이 하느님이 절실하게 될 때는 이미 하느님의 손길이 그들에게서 벗어난 때라는 것을 그들은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르짖고 불러도 그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때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에 열심히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기회가 있을 때에 부지런히 남을 도우십시오. 그런 모든 기회들이 사라지고 당신에게 일상적으로 주어지던 것들이 그치는 순간 당신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부르짖고 부르짖어도 당시의 외침을 들어줄 이가 있을까 의문 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부르짖음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사들이고 하느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스스로 내치고서 뒤늦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내가 바이올린을 이렇게 잘 연주하니 사람들이 나에게 찬사를 던지는 것이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내가 지혜가 뛰어나서 공부를 뛰어나게 잘 했으니 당연히 좋은 직장을 얻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벌어들이는 셈이다. 이런 식의 기본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이 교만은 단순히 남보다 낫다는 수준의 교만이 아니라 ‘하느님? 그게 뭐야? 지금은 나에게 필요 없으니 꺼져버려.’라는 식의 교만입니다. 헌데 그들이 하느님이 절실하게 될 때는 이미 하느님의 손길이 그들에게서 벗어난 때라는 것을 그들은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르짖고 불러도 그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때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에 열심히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기회가 있을 때에 부지런히 남을 도우십시오. 그런 모든 기회들이 사라지고 당신에게 일상적으로 주어지던 것들이 그치는 순간 당신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부르짖고 부르짖어도 당시의 외침을 들어줄 이가 있을까 의문 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부르짖음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사들이고 하느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스스로 내치고서 뒤늦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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