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줏대 없는 사람들

자신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자신의 주변에 떠다니는 사람을 붙들고 그의 위치를 똑바로 잡겠다고 한다면 그 모습처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끌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게 그럴만한 능력과 합당한 분별력, 그리고 굳건한 기틀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최고의 기틀은 하느님이 되어야 할테지요. 그러지 않고 세상 안에서 무언가에 기틀을 세워 보아야 그것은 모래 위에 쌓는 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문화’된 사람들을 동경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전문화’가 의미하는 것은 한 분야에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악에 전문가는 컴퓨터에 대해 무지해도 아무 상관이 없지요. 반대로 컴퓨터를 잘 하는 사람은 음치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전문분야를 파고들어 거기에서 일인자가 되고자 하지만 그렇게 전문화를 이룬다는 것이 ‘통합적인 기초’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식을 찾는다고 길을 떠났지만 결국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그 안에 엄청나게 더 깊은 차원을 숨기고 있더라는 것이고, 심지어 그런 것들은 우리가 현재 지닌 측정 장비로는 측정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 이제는 아예 추상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셈이지요. 즉 가정과 이론은 존재하지만 그걸 검증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17차원, 또는 18차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4차원의 공간 안에서 살아가기에 그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참 잘도 살아갑니다. 하루동안 무언가에 열정을 쏟고 나면 또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우리가 마음을 쏟을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세상은 ‘소식’들로 가득하고 이런 저런 것들에 손쉽게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이지요.

하느님을 만나는 것 마저도 ‘기술화, 전문화’가 되어버려 도리어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걸 해야 한다’고 주장해대는 책들을 열심히 따라가다가 도리어 길을 잃는 셈이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 역시 그러한 과정을 부추기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지 모릅니다. 이런 저런 글들을 잔뜩 쏟아내는데 그러는 가운데 도리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길을 잃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눈에 드러나는 세상을 따르려 하니 그러지 말라고 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걸 하려고 하니 별달리 할 건 없다고 하고. 이건 정말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을 따라야 한다면 뭔가 뚜렷하게 따를 게 있다면 좋을텐데 왜 하느님은 숨어 계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감추고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내버려두시는 것일까요?

문제는, 하느님은 이미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분을 찾고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현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하느님이 드러내신 그분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주교님을 만나면 그분의 고귀하고 드높으신 직분 때문에 뭔가 레벨이 다름을 느끼고, 동네 신실한 할아버지를 만나면 무시해 버리는 중에 우리는 정작 만나야 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높은 자리를 찾고,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엄청 힘든 것들을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셨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쥐고 있는 것을 놓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쥐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취해 본 적이 없고, 내가 지닌 삶이 없으니 포기할 수 있는 삶도 없고, 그래서 하느님이 주시려는 영원의 삶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 또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식적이고 피상적인 삶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가장 먼저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의 주도권을 쥐고 나 스스로 내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바로 그때에야 하느님은 나의 삶을 도구로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한 부분이 되는 셈이지요. 그분의 영원의 속성을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우리는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지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