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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에 대한 소고

글씨를 올바로 배우지 못한 아이가 자신이 받아적은 것의 오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것의 오류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틀린 글씨로 살아가면 중요한 일에서 더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됩니다. 행정 문서에 자신의 주소를 틀리게 적어 놓는다던가, 자신의 이름 석자도 틀리게 적어서 다른 이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어줄 수 있는 노릇이지요. 영적으로도 그릇된 신앙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에, 그리고 심하게는 악령에게 내어주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굳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지요. 이것이 그릇된 신앙의 무서운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지금 이 글을 적는 사제가 가진 종교를 택해야 하는가? 로마 가톨릭은 역사 안에서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저지른 잘못을 두고 옳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로마 가톨릭은 역사 안에서 이런 저런 구체적인 잘못을 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수많은 본당에서는 앓는 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신앙 생활 안에서 연륜 있는 신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 외에 다른 진실한 교회가 있는 것인가? 사람이 모인 공동체는 어디에나 그릇됨이 존재합니다. 따로 떨어진 완전무결한 공동체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아픔을 지니고 상처가 나면서도 다시 올바른 길을 향해 나아갈 뿐이지요.

지상에서의 우리의 과제는 ‘완벽함’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과제는 하나로 모여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우월해 보이는 것을 가졌다고 그것으로 다른 이를 욕한다면 우리가 가진 우월한 것의 진실성도 사라져 버리는 셈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진실된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이웃들을 더욱 푸근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무엇, 그것을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이 스스로 다가올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약한 사람들이라서 자신이 성장해 온 배경이 되는 것을 쉽게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종교를 바꾸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어서 바꾸는 것이지 그러한 사실을 통해서 한 종교가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상대편 종교도 우리 종교에서 자신들에게로 넘어온 똑같은 실례를 들 수 있을 테니까요.

핵심은 다투려고 하지 말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같은 하느님을 바라볼 수도 있고, 그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일치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로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모든 것들을 긴밀히 조정하여 하나로 어떻게든 뭉쳐 보겠다는 시도는 분명히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불교와 유교,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등의 모든 종교가 그 제도와 형식으로 하나로 일치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전 세계의 국가가 모두 단일 정부 체제 아래에 모이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를 하지 말라는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마다의 종교가 모두 존중받을 만하다면 선교라는 것은 필요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문제는 ‘무엇을 선교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려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형식과 제도인지, 아니면 진정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도와주는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의 선교는 껍데기 선교가 되고 말고, 숫자 불리기 전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어난 숫자는 거품과 같이 다시 사그라들고 말 것입니다.

선교는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선교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라는 단어가 단순히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도를 아십니까?’를 거듭 묻는 식이거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귀에 거슬리게 외쳐 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진정한 선교는 자신이 아는 바를 살아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어서 사람들이 빛이 필요할 때에 우리를 찾고, 소금이 필요할 때에 우리를 찾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고, 빛을 잃은 촛불 역시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빛과 진리는 우리가 지닌 사랑이어야 하며 사람들의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에 우리를 찾아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이 돌아올 때에 과연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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