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종종 관찰하고는 합니다. 주로는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본당에 대한 체험들이지요. 그리고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들끼리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최근에는 SNS가 활발해지면서 그러한 체험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들은 존중합니다. 그리고 일리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직자에 대한 불만이고 그리고 나머지는 각자 생각하는 바대로 교회가 움직이지 않는 것(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 정치에 대한 의견 표명 등등)에 대한 불만입니다.
언뜻 보기에 문제는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처럼 보입니다. 저마다 투덜대긴하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괜히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할까 두렵기도 하고, 또 그래도 교회인데 뭔가 다른 뜻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보고 들은 게 있더라도 나 자신도 완전히 떳떳하지 못한 인간이기도 하고…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런 부분들을 파악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적절한 지침들을 주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5)
무엇보다도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용서받기 위해서 남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잘못하는 이를 방치하라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명백하게 드러나게 잘못하는 형제가 있으면 당연히 고쳐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단순히 그가 하는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더라도 잘못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즉, 나는 사과를 좋아하는데 상대는 귤을 좋아해서 기분나빠서 고치려는 게 아니라 명백하게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죄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잘못을 타이르는 자는 그 형제가 죄를 짓는 당사자이어야 합니다. 그걸 전해들은 누군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분별력이 떨어져서 그저 소소한 일에 성질이 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앙심들이 모여서 교회를 향한 전반적인 반감을 형성하곤 하지요.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교회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장 저 자신과 제 주변만 해도 이런 저런 소소한 오류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적으로 겪는 어두움들을 애써 고쳐 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저 흐름에 편승해서 자신이 겪지도 않은 일들에 마구 의견을 개진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전해들은 일로 심판하지 마시고, 직접 겪으신 일들은 사랑으로 그 형제에게 직접 조언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개인적인 체험들은 존중합니다. 그리고 일리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직자에 대한 불만이고 그리고 나머지는 각자 생각하는 바대로 교회가 움직이지 않는 것(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 정치에 대한 의견 표명 등등)에 대한 불만입니다.
언뜻 보기에 문제는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처럼 보입니다. 저마다 투덜대긴하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괜히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할까 두렵기도 하고, 또 그래도 교회인데 뭔가 다른 뜻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보고 들은 게 있더라도 나 자신도 완전히 떳떳하지 못한 인간이기도 하고…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런 부분들을 파악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적절한 지침들을 주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5)
무엇보다도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용서받기 위해서 남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잘못하는 이를 방치하라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명백하게 드러나게 잘못하는 형제가 있으면 당연히 고쳐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단순히 그가 하는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더라도 잘못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즉, 나는 사과를 좋아하는데 상대는 귤을 좋아해서 기분나빠서 고치려는 게 아니라 명백하게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죄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잘못을 타이르는 자는 그 형제가 죄를 짓는 당사자이어야 합니다. 그걸 전해들은 누군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분별력이 떨어져서 그저 소소한 일에 성질이 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앙심들이 모여서 교회를 향한 전반적인 반감을 형성하곤 하지요.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교회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장 저 자신과 제 주변만 해도 이런 저런 소소한 오류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적으로 겪는 어두움들을 애써 고쳐 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저 흐름에 편승해서 자신이 겪지도 않은 일들에 마구 의견을 개진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전해들은 일로 심판하지 마시고, 직접 겪으신 일들은 사랑으로 그 형제에게 직접 조언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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