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큰 오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능력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책임이 부여됩니다. 언뜻 사람의 존엄성은 모두 똑같다는 평등함이 모든 인간이 모든 면에 있어서 ‘똑같다’는 획일화의 의미는 아닙니다. 남자는 임신하고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먹일 수 없으며 여자의 육체와 심리는 남성보다는 복잡미묘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수행할 일을 맡기십니다. 극단적인 예로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에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버스운전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비단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사람은 저마다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삶 안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 존재하지요.
우리는 그 가운데 무턱대고 많은 걸 얻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은사를 받기를 바라지요.
“많은 은사에는 많은 책임이 따릅니다.”
이 철칙을 망각하면 우리는 청한 은사를 받은 뒤에 하느님께 투덜거리게 됩니다. 이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직분만큼의 책임감을 지니게 됩니다. 마치 지금의 정치권의 사람들처럼 직분만 떠맡고 그 직분에서 오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면서 나자빠져 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느님이 맡기시는 직분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라는 것은 영원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서로를 보살필 책임을 주셨습니다. 영혼을 영원으로 이끌 책임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를 저마다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사제대로,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각자가 수행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사제는 당연히 평신도와 같은 삶의 고난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평신도의 긴박한 삶을 뼈저리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제의 고유한 직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제에게 그러한 책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제가 그러한 시간들을 자신의 개인적 안락만을 위해서 써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제는 더 많은 시간을 하느님에게 헌신하고 영혼들을 하느님께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평신도가 사제와 같은 수준의 영적인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도 웃기는 말입니다. 그래서 평신도에게 성무일도는 절대로 의무가 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는 성무일도를 바칠 시간을 할애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충실히 하고, 부부간에 애정을 돈독히 하고, 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저마다의 직분이 있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더 많은 탈렌트를 받고 더 적은 탈렌트를 받는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한 탈렌트를 받은 이들이 있으니 언뜻 그들은 너무 적게 받은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들도 충분하고 넉넉히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그릇 크기에 맞게 받은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충실하면 됩니다. 남을 바라볼 필요도 없고, 그저 자신이 받은 탈렌트만큼 열심히 일하면 됩니다. 그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수행할 일을 맡기십니다. 극단적인 예로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에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버스운전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비단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사람은 저마다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삶 안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 존재하지요.
우리는 그 가운데 무턱대고 많은 걸 얻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은사를 받기를 바라지요.
“많은 은사에는 많은 책임이 따릅니다.”
이 철칙을 망각하면 우리는 청한 은사를 받은 뒤에 하느님께 투덜거리게 됩니다. 이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직분만큼의 책임감을 지니게 됩니다. 마치 지금의 정치권의 사람들처럼 직분만 떠맡고 그 직분에서 오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면서 나자빠져 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느님이 맡기시는 직분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라는 것은 영원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서로를 보살필 책임을 주셨습니다. 영혼을 영원으로 이끌 책임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를 저마다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사제대로,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각자가 수행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사제는 당연히 평신도와 같은 삶의 고난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평신도의 긴박한 삶을 뼈저리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제의 고유한 직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제에게 그러한 책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제가 그러한 시간들을 자신의 개인적 안락만을 위해서 써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제는 더 많은 시간을 하느님에게 헌신하고 영혼들을 하느님께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평신도가 사제와 같은 수준의 영적인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도 웃기는 말입니다. 그래서 평신도에게 성무일도는 절대로 의무가 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는 성무일도를 바칠 시간을 할애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충실히 하고, 부부간에 애정을 돈독히 하고, 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저마다의 직분이 있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더 많은 탈렌트를 받고 더 적은 탈렌트를 받는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한 탈렌트를 받은 이들이 있으니 언뜻 그들은 너무 적게 받은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들도 충분하고 넉넉히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그릇 크기에 맞게 받은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충실하면 됩니다. 남을 바라볼 필요도 없고, 그저 자신이 받은 탈렌트만큼 열심히 일하면 됩니다. 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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