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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자들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요한 1,7)

“그게 뭔 대수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질문은 차라리 순진한 질문입니다. 몰라서 묻는 거지요.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껏 지녀오던 모든 신앙의 근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되어 다가오신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양심을 지닌 누구라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접한 적이 없고 반대로 그분에 대한 오해만 잔뜩 쌓여서 그분을 믿지 못하는 것을 두고 어떻게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또 자신의 욕구에 사로잡혀 그분의 존재의 의미와 가르침을 곡해해서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자들은 위험한 자들입니다. 즉 ‘속이는 자들’이지요.

“속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속인다는 것은 진실을 어긋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되어 다가오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 가운데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원래 악하고 서로를 속이는 존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 언제라도 진리를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지요.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신앙의 요소들마저도 속이는 재료로 써먹는 자들이지요. 때로는 교회 가장 깊은 곳에도 파고 들어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속지 않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이미 우리 내부에 ‘필터’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속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양심’이라는 것이지요. 이 기본적인 필터를 바탕으로 거짓된 가르침들을 구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우리 내부의 자체정화 시스템은 곧잘 망가지곤 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 남자 친구가 있어 밤에 몰래 나가야 하는 처자는 엄마 아빠에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게 됩니다.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이미 그 마음이 자신의 욕구에 의해 지배당해 옳고 그름을 분간할 기준을 상실해 버린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길을 엇나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당신의 제자단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할 희망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함이었지요. 그래서 ‘제자단’은 그 가르침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제자들에게서는 약점이 늘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는 베드로 사도도 이방인들과의 자리에서 유다인들의 눈치를 보는 비겁한 행위를 하기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전체 제자단의 신앙감, 전체 제자단의 행보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상 교회는 비록 약해서 쓰러질지언정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할 것입니다.

속이는 자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는 결국 그 본심이 녹아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성령을 통해서 움직이는 제자단도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성령을 느낄 수 있지요. 하지만 무지몽매한 군중들은 전혀 엉뚱한 탐욕의 교주에게 자신의 신앙을 내던지고 반대로 진정한 시대의 예언자에게는 돌을 내던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한 이들이 많았지요. 그들은 단순히 선동을 당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속이는 자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 군중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시대에 이런 저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이 들려오지만 저마다 각자의 성향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에게로 나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과 행동에 주목하십시오. 모르신다면 배우십시오. 그리고 난 뒤에 비판할 것이 있으면 비판하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요한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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