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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와 시집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루카 20,34-36)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중요한 행위 가운데 하나입니다. 독신에 대한 특별한 소명을 받지 않는 이상은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가를 가야 자신을 평생 돌보아줄 사람을 얻고, 나아가 자녀들도 얻어서 그 자녀들이 장성할 때에 늙은 자신을 돌보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는 행위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 됩니다.

오늘날 세상의 제도가 ‘발전’ 하면서 삶의 보조에 대한 것들이 사회 제도적으로 대체되고, 과학적으로 임신을 막아 책임을 져야 할 자녀가 생기는 것을 예방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인간들이 서로의 인격적 미흡함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힘들어하기 시작하면서 ‘싱글’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갑니다. 하지만 이 ‘싱글’의 의미는 위의 성경구절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런 종류의 싱글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비겁한 이들일 뿐입니다. 자신의 책임이 더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혼자 살기를 즐기는 사람들일 뿐이지요. 위의 성경 구절에서 시집가지 않고 장가드는 일이 없는 이들은 보다 ‘완전함’에 도달하기에 시집과 장가보다 더 큰 가치를 선택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현재 우리 교회의 ‘독신제’를 살펴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제와 수도자가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부활한 이들의 완전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싱글’의 편안함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흔히 하는 말대로 장가 가서 잘 살 사람은 신부 되어서도 잘 산다는 말처럼,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생활은 스스로의 성덕을 드러내는 일이어야 하지 세상의 잡다한 일들에서 도피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사제와 수도자는 자신의 독신의 자유로움을 통해서 더욱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지요.

시집과 장가는 여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남성이나 한 여성이 하느님과 결합하여 한 몸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천상적인 사정이기에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는 현행 ‘독신제’에 대해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지금의 부부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보다 넓은 시선을 가지고 지금의 혼인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 문제는 종말이 올 때까지도 딱히 해결점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상에 들어서면 위의 성경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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