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3차원 안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극점을 등반하거나 달에 순식간에 간다는 식의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3차원 안의 존재라 하지만 엄연한 한계가 있는 셈이지요.
설령 우리가 시공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 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 수 있는 이들이 될 수 있겠지만 고착된 과거를 수정하거나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는 미래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볼리비아에 있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을 함께 모을 수 있으며, 또한 이미 2000년 전의 일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 우리는 시공간의 특정 부분에 몸을 두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우리의 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향후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현세의 것들을 인지하면서 살아가니까요. 하지만 때로 믿을 수 없는 증언들을 마주할 때에 우리는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비오 신부님의 이처소재,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 파티마에서 일어난 해의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면 우리는 그저 어느 전기작가가 꾸며낸 것이리라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우리가 전해 듣는 여러가지 것들 가운데에서는 실제 일어난 일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없어도 충분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를 이해해야 하지요.
그런 기적들의 근본에는 ‘인간 자유의지의 변화’라는 핵심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기적들을 통해서 믿지 못하던 이들에게 믿음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하지만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스로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무르려는 이들이지요. 한계가 너무나도 뚜렷한 이 시간과 공간 안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시공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 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 수 있는 이들이 될 수 있겠지만 고착된 과거를 수정하거나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는 미래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볼리비아에 있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을 함께 모을 수 있으며, 또한 이미 2000년 전의 일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 우리는 시공간의 특정 부분에 몸을 두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우리의 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향후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현세의 것들을 인지하면서 살아가니까요. 하지만 때로 믿을 수 없는 증언들을 마주할 때에 우리는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비오 신부님의 이처소재,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 파티마에서 일어난 해의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면 우리는 그저 어느 전기작가가 꾸며낸 것이리라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우리가 전해 듣는 여러가지 것들 가운데에서는 실제 일어난 일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없어도 충분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를 이해해야 하지요.
그런 기적들의 근본에는 ‘인간 자유의지의 변화’라는 핵심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기적들을 통해서 믿지 못하던 이들에게 믿음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하지만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스로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무르려는 이들이지요. 한계가 너무나도 뚜렷한 이 시간과 공간 안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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