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림을 받아들이고 환부를 찾아낸 이들이 그때부터 해야 할 일은 치료를 맡긴 의사를 굳게 믿고 치료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의사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자기가 의사보다 더 똑똑한 척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스스로의 오류에 빠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온갖 이단들이 속출하게 된 셈입니다. 자신이 아는 하느님을 자기 스스로 믿겠다고 나선 이들이 빠져드는 오류이지요.
아무리 의사가 아둔해도 그 분야에 공부를 한 사람이고 우리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은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가지 임상 경험을 통해서 이런 저런 부작용과 기타 작용들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헌데 어디서 주워 들은 지식으로 그런 의사에게 대들고 의사 몰래 술도 마시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고 하다가는 스스로의 병을 키우고 맙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치유하실 분은 다른 분도 아니고 예수님, 즉 가장 완벽한 의사입니다. 헌데 그분 앞에서 잘난 척을 하는 사람, 심지어는 그분을 무시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이들이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이들이 스스로의 병을 낫게 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기차를 타지 않고도 대구에서 서울까지 자신의 상상 속의 초능력으로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는 순진무구한 아이와도 같습니다.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의사는 가장 최고의 처방전으로 우리를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때에 치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나를 괴롭히는 남편은 나의 ‘교만’과 ‘인내심 부족’을 위한 치유제이고, 속을 썩이는 자녀들은 나의 ‘분별’을 위한 치유제인 셈이지요. 이처럼 각기 저마다 다 필요가 있는 것들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단지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 분별하려고 드니 모든 것이 못마땅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포기하는 자들이 속출합니다. 시험에 붙으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시험공부는 하기 싫은 부류들이 속출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저마다 변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변명의 주된 내용은 ‘내 인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인생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레퍼토리입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질 수 없는 십자가는 지우지 않으십니다. 만일 욥에게 일어났던 비극의 1000분의 1만 주어진다 해도 당장 하느님을 저주할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과 아픔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수준의 것입니다. 물론 시작부터 이 길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내용은 추후에 다루겠습니다.
인고의 시간, 인내의 시간을 지내고 나면 슬슬 다리에 힘이 붙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전과는 달라진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서 더욱 의사를 신뢰하게 되고 더욱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런 욕구를 실천하기 시작하게 되지요.
결국 이들은 자신에게 약속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한 자들이니 아주 아주 큰 일들이 맡겨질 것입니다.
아무리 의사가 아둔해도 그 분야에 공부를 한 사람이고 우리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은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가지 임상 경험을 통해서 이런 저런 부작용과 기타 작용들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헌데 어디서 주워 들은 지식으로 그런 의사에게 대들고 의사 몰래 술도 마시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고 하다가는 스스로의 병을 키우고 맙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치유하실 분은 다른 분도 아니고 예수님, 즉 가장 완벽한 의사입니다. 헌데 그분 앞에서 잘난 척을 하는 사람, 심지어는 그분을 무시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이들이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이들이 스스로의 병을 낫게 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기차를 타지 않고도 대구에서 서울까지 자신의 상상 속의 초능력으로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는 순진무구한 아이와도 같습니다.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의사는 가장 최고의 처방전으로 우리를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때에 치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나를 괴롭히는 남편은 나의 ‘교만’과 ‘인내심 부족’을 위한 치유제이고, 속을 썩이는 자녀들은 나의 ‘분별’을 위한 치유제인 셈이지요. 이처럼 각기 저마다 다 필요가 있는 것들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단지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 분별하려고 드니 모든 것이 못마땅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포기하는 자들이 속출합니다. 시험에 붙으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시험공부는 하기 싫은 부류들이 속출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저마다 변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변명의 주된 내용은 ‘내 인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인생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레퍼토리입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질 수 없는 십자가는 지우지 않으십니다. 만일 욥에게 일어났던 비극의 1000분의 1만 주어진다 해도 당장 하느님을 저주할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과 아픔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수준의 것입니다. 물론 시작부터 이 길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내용은 추후에 다루겠습니다.
인고의 시간, 인내의 시간을 지내고 나면 슬슬 다리에 힘이 붙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전과는 달라진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서 더욱 의사를 신뢰하게 되고 더욱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런 욕구를 실천하기 시작하게 되지요.
결국 이들은 자신에게 약속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한 자들이니 아주 아주 큰 일들이 맡겨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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