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림에 대한 첫 반응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뭔가 그릇되었고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이들이지요.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아예 그럴 기회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고 주어진다고 해도 무시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며, 나아가서는 더욱 더 죄악으로 빠져드는 이들이 상당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둠의 무리들은 추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찔린’ 이들을 살펴봅시다. 그들에게는 아직 ‘양심’이 살아 있어서 ‘인식’ 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 관습, 실천은 아직 죄스러움에 남아 머무는 상태이지요.
이 경우에 필요한 일은 뜬금없는 실천이 아닙니다. 전에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대뜸 실천하다가는 황새를 따라가던 뱁새 마냥 가랑이가 찢어지고 맙니다. 이들이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찔린 상황으로 더 다가서 보는 것입니다. 찔린다고 부담스럽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찔릴 수 있도록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과도 같아서 마음을 갈라놓기에 사실 그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찔리는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단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다가가서 열심히 찔리고 유야무야 묻어 두었던 상처가 헤집어지고 나면 비로소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의사 선생님에게 이곳 저곳에 대한 증세를 모두 검진받고 비로소 최종 병명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두통이 있는데 변비약을 먹고, 설사가 나는데 잇몸약을 먹게 되어 정작 아픈 곳은 여전히 아픈데 일단 약은 먹으니 뭔가 나아져야 하는데 전혀 나아지지는 않는… 정말 애매모호한 상태로 접어들어 버리고 맙니다. 가장 극심히 아픈 환부를 집중공략해서 파악해 두어야 합니다.
돈에 대한 탐욕, 질투와 시기, 분노, 증오, 게으름… 등등의 우리 내면 깊숙히 숨어 있으면서 그 모양새를 가리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던 그 어둠의 뿌리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어느 수녀님이 자신의 수도원 안에서 명망을 얻으면서 은근히 자존심과 교만을 잔뜩 키워 놓은 케이스입니다. 자신은 열심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더욱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자신의 교만이 잔뜩 드높아져 있었음을 가로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환부를 올바로 파악한 환자는 다시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가는 목적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아픈 부위를 이미 알고 있기에 의사는 이곳 저곳을 찌를 필요 없이 환부에 대한 치료를 시작합니다. 물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알면서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큰 차이점입니다. 마치 이들 가운데 어딘가 아픈데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지를 몰라서 늘 찜찜하게 지내고 늘 고통 받으면서 지내다가 병원에 갔다오고 나서는 어느 이가 아픈지를 알아서 그 이에 집중 치료를 받지만 적어도 어디가 아픈지는 알고 치료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러한 내부의 썩은 부위는 이미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지니고 온 상처이기 때문에 좀처럼 받아들이고 인정하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되게 됩니다.(글이 너무 길어지니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어둠의 무리들은 추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찔린’ 이들을 살펴봅시다. 그들에게는 아직 ‘양심’이 살아 있어서 ‘인식’ 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 관습, 실천은 아직 죄스러움에 남아 머무는 상태이지요.
이 경우에 필요한 일은 뜬금없는 실천이 아닙니다. 전에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대뜸 실천하다가는 황새를 따라가던 뱁새 마냥 가랑이가 찢어지고 맙니다. 이들이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찔린 상황으로 더 다가서 보는 것입니다. 찔린다고 부담스럽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찔릴 수 있도록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과도 같아서 마음을 갈라놓기에 사실 그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찔리는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단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다가가서 열심히 찔리고 유야무야 묻어 두었던 상처가 헤집어지고 나면 비로소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의사 선생님에게 이곳 저곳에 대한 증세를 모두 검진받고 비로소 최종 병명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두통이 있는데 변비약을 먹고, 설사가 나는데 잇몸약을 먹게 되어 정작 아픈 곳은 여전히 아픈데 일단 약은 먹으니 뭔가 나아져야 하는데 전혀 나아지지는 않는… 정말 애매모호한 상태로 접어들어 버리고 맙니다. 가장 극심히 아픈 환부를 집중공략해서 파악해 두어야 합니다.
돈에 대한 탐욕, 질투와 시기, 분노, 증오, 게으름… 등등의 우리 내면 깊숙히 숨어 있으면서 그 모양새를 가리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던 그 어둠의 뿌리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어느 수녀님이 자신의 수도원 안에서 명망을 얻으면서 은근히 자존심과 교만을 잔뜩 키워 놓은 케이스입니다. 자신은 열심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더욱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자신의 교만이 잔뜩 드높아져 있었음을 가로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환부를 올바로 파악한 환자는 다시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가는 목적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아픈 부위를 이미 알고 있기에 의사는 이곳 저곳을 찌를 필요 없이 환부에 대한 치료를 시작합니다. 물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알면서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큰 차이점입니다. 마치 이들 가운데 어딘가 아픈데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지를 몰라서 늘 찜찜하게 지내고 늘 고통 받으면서 지내다가 병원에 갔다오고 나서는 어느 이가 아픈지를 알아서 그 이에 집중 치료를 받지만 적어도 어디가 아픈지는 알고 치료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러한 내부의 썩은 부위는 이미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지니고 온 상처이기 때문에 좀처럼 받아들이고 인정하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되게 됩니다.(글이 너무 길어지니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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