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무슨 변명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아주 바닥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까요. 우리가 하는 모든 ‘변명’의 근거들마저도 그분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심판을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직접 실행하고 말한 것들이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퍼 주는 되로 우리에게 퍼 주십니다. 우리가 퍼 주지 않고 모욕하고 따귀를 때리면 그렇게 한 것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남을 비판하고 고소하고 증오한 것을 그대로 우리 스스로에게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얼 하실 것인가를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주위에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나를 살펴보면 그것이 훗날 나에게 닥칠 일이 됩니다. 다른 이가 그들의 약점으로 쓰러졌을 때에 우리는 기꺼이 다가가서 일으켜주고 그들이 똑바로 걸어가도록 도와주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하실 거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약함으로 우리에게 실수를 했을 때에 우리는 눈을 흘기고 그들을 쳐다보나요?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다른 이의 잘못은 어떠한가요? 다른 이가 막말로 우리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심지어는 고의로 그런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그리고 나중에 와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주변에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요.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열심히 돕다가 침뱉음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모욕에도 발끈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는 아니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만일 이 글을 기억하고 하루를 보내 본다면 당장에 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착각 속에서 빠져 살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퍼 주는 되로 우리에게 퍼 주십니다. 우리가 퍼 주지 않고 모욕하고 따귀를 때리면 그렇게 한 것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남을 비판하고 고소하고 증오한 것을 그대로 우리 스스로에게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얼 하실 것인가를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주위에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나를 살펴보면 그것이 훗날 나에게 닥칠 일이 됩니다. 다른 이가 그들의 약점으로 쓰러졌을 때에 우리는 기꺼이 다가가서 일으켜주고 그들이 똑바로 걸어가도록 도와주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하실 거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약함으로 우리에게 실수를 했을 때에 우리는 눈을 흘기고 그들을 쳐다보나요?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다른 이의 잘못은 어떠한가요? 다른 이가 막말로 우리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심지어는 고의로 그런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그리고 나중에 와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주변에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요.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열심히 돕다가 침뱉음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모욕에도 발끈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는 아니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만일 이 글을 기억하고 하루를 보내 본다면 당장에 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착각 속에서 빠져 살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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