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두 사람이 싸웁니다. 과연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까요?
일단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두 사람에게 으름장을 놓습니다. 두 사람을 위협하고 중재하는 사람이 지닌 강한 힘을 드러내어 두 사람을 주눅들게 만듭니다. 그러면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품은 ‘증오의 마음’은 전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재인이 사라질 때를 기다려 다시 싸움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의 불화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중재하는 사람이 둘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올바로 깨우쳐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단순히 다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려줄 수 있다면 둘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싸움을 그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 안에 ‘선의’를 심을 수 있다면, 아예 싸움의 씨앗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한 측이 다른 한 측의 비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넘어서서 그를 축복해 줄 수 있다면, 싸움은 아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도움은 신비적 차원이 아니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영적이고 거룩한 부분이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으로 내비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호에 따라서 방법을 선택합니다. 일단 싸우고 있는 둘의 사이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애써 이성 안에서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기도로 돕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은 모두 필요한 이들입니다. 당장 옆 사람을 패고 있는데 그걸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니까요. 그리고 차후를 생각해서 합리적인 중재안을 생각해 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도움의 차원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리 훌륭한 중재안을 두고 아무리 힘센 자를 중재인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둘은 결국 다시 싸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단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두 사람에게 으름장을 놓습니다. 두 사람을 위협하고 중재하는 사람이 지닌 강한 힘을 드러내어 두 사람을 주눅들게 만듭니다. 그러면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품은 ‘증오의 마음’은 전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재인이 사라질 때를 기다려 다시 싸움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의 불화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중재하는 사람이 둘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올바로 깨우쳐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단순히 다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려줄 수 있다면 둘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싸움을 그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 안에 ‘선의’를 심을 수 있다면, 아예 싸움의 씨앗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한 측이 다른 한 측의 비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넘어서서 그를 축복해 줄 수 있다면, 싸움은 아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도움은 신비적 차원이 아니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영적이고 거룩한 부분이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으로 내비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호에 따라서 방법을 선택합니다. 일단 싸우고 있는 둘의 사이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애써 이성 안에서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기도로 돕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은 모두 필요한 이들입니다. 당장 옆 사람을 패고 있는데 그걸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니까요. 그리고 차후를 생각해서 합리적인 중재안을 생각해 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도움의 차원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리 훌륭한 중재안을 두고 아무리 힘센 자를 중재인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둘은 결국 다시 싸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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