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감각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요. 그리고 죄로 인해서 영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에 가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세우고 살리고 나아가서 ‘영원’으로 이끄는 초대는 우리 인간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영원이신 분의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초대하시고 손을 내밀면 우리는 그 구원의 손길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일종의 착각에 불과합니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욕구’가 없는 존재는 아예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수자처럼 숨어 살면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그러한 극도의 노력으로도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다가오신 하느님만이 그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영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면 그분의 이름을 냅다 불러 제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정작 그분이 걸으시는 길은 하나도 걷지 않으면서 그분을 믿는다고 ‘우겨대는’ 부류가 양산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속적 부유함을 탐닉하고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시궁창 쓰레기 만도 못한 것으로 타락시키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가능한 그러한 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장님들에 불과하지요.
이런 그릇된 모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가서 주님의 가르침이 뭐냐고 물으면 모르고 있는게 아닙니다. 결국 그들은 알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용서하라고 가르친 사실을 알고, 나아가 사랑하라고 가르친 사실을 압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를 돌보아야 한다고 가르친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의 지식은 가득 차 있으나 그들의 삶은 공허합니다. 그들은 그런 모순된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느님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솔직하게 우리 자신 안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뒤따라 걸어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을 뒤따라 걷는다는 것은 이름난 사회 운동에 핏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에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으면 아무리 가난한 이를 위해서 열심히 기금을 모은다 한들 부질없는 짓에 불과합니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욕구’가 없는 존재는 아예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수자처럼 숨어 살면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그러한 극도의 노력으로도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다가오신 하느님만이 그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영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면 그분의 이름을 냅다 불러 제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정작 그분이 걸으시는 길은 하나도 걷지 않으면서 그분을 믿는다고 ‘우겨대는’ 부류가 양산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속적 부유함을 탐닉하고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시궁창 쓰레기 만도 못한 것으로 타락시키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가능한 그러한 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장님들에 불과하지요.
이런 그릇된 모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가서 주님의 가르침이 뭐냐고 물으면 모르고 있는게 아닙니다. 결국 그들은 알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용서하라고 가르친 사실을 알고, 나아가 사랑하라고 가르친 사실을 압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를 돌보아야 한다고 가르친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의 지식은 가득 차 있으나 그들의 삶은 공허합니다. 그들은 그런 모순된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느님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솔직하게 우리 자신 안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뒤따라 걸어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을 뒤따라 걷는다는 것은 이름난 사회 운동에 핏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에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으면 아무리 가난한 이를 위해서 열심히 기금을 모은다 한들 부질없는 짓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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