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9-30
옛날 맥가이버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위기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려오는 순간입니다. 주인공은 모든 동네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맥가이버칼 하나로 뚝딱뚝딱 위기를 헤쳐나갈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고장난 차도 수리하고 심지어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만들어서 위기 상황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쾌재를 외치곤 했지요.
예수님의 적대자들, 아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화가 엄청 났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불러 일으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째 그들은 화나게 되었습니다. 담배는 좋지 않다는 소식이 남편이 담배를 끊기를 바라는 자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반대로 담배를 아직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가신 이야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했고 진리의 친구들은 그 말씀을 즐기지만 반대로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는 이를 증오하고 거부합니다. 가능하면 진리를 외치는 그 목소리를 없애고 싶어서 모든 수단을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 들기까지 합니다. 어차피 진리의 길에서 멀어진 그들이기에 그들은 사람을 죽여도 상관이 없는 이들입니다. 필요하다면 낙태도 하고 필요하다면 안락사도 종용하고 사형도 찬성하고 하느님이 주인이신 생명을 말살하는 데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지는 이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이야기를 부자들이 싫어했고, 누군가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 이들이 싫어했고, 사람들이 눈멀어 있기를 바라는 이들이 싫어했으며, 억압을 해야 복종시키기 편안한 이들이 싫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선포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들이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단을 찾았습니다. 가장 쉽고 편안한 수단은 '지연'이었습니다. 저 친구 내가 아는 사람 아들이다. 나는 그 사람을 잘 알고 그래서 그 아들도 잘 알 수 밖에 없다. 헌데 저런 건방진 소리를 한다고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 상응하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즉 진리의 말씀이 모두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가 그들에게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자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재미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그들이 형성한 위기가 그분에게는 전혀 위기가 아닌 일이 되었습니다. 마치 맥가이버처럼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해서 그분은 그 위기보다도 더 뛰어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온갖 수단으로, 즉 험담으로 중상으로 심지어 육체적인 힘을 쓰는 알력으로까지 그분을 극단으로 몰아갔지만 그분은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떠나 가십니다.
이든 저든 그들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떠나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잃을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정반대로 그분을 쫓아보낸 그들이 가장 소중한 생명의 말씀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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