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아름다워야 했다. 광고는 늘 새로운 소비 주체를 찾아내어야 했고 그것은 당연히 남편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아내들이었다. 그래서 광고는 끊임없이 아내들에게 당신은 아름답다고, 아니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광고의 적극적 소비 주체인 주부들은 그에 세뇌되어 가기 시작했다.
인생은 한 남자에게 묶여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자녀들에게 얽매여 사는 것은 미개한 주부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했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꾸민 것을 남에게 드러내어야 했다. 자연스레 그들이 사랑받는 대상은 남편에게만 국한되지 않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마음에 허영이 불어넣어지자 당연히 가정은 서서히 와해되어 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것이 유행이 되고 주름지지 않는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갖추는 것이 주된 과업이 된 그들에게 '헌신'이라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했다.
선악과는 다름 아닌 생명에 대한 경시였고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그로부터 내려오는 올바른 권위에 대한 거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가정 안에 죄의 씨앗이 침투해 들어왔고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쁜' 성모상을 찾지 엄마와 아내의 헌신을 담은 현실적인 성모상을 찾지 않는다.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도 많은 허영이 깃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한 신앙,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신앙생활이 그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게 된다. 바리사이들의 허영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활기를 치고 있고, 뱀과 같은 악마는 가정을 메인 타겟으로 삼았으며 그 가정의 가장 중심 연결고리인 여성의 위치를 아주 기민하게 내리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은 있다. 남성들의 삶의 자리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대외적인 일을 하면서 가정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성당에서 남성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여성들은 성당에 넘쳐난다.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모이는 이들은 거의 여성들이다.
교회는 다시 그 여성성 안에 생명을 잉태해야 한다. 교육의 기회를 늘리고 참된 가르침을 전해 주면서 여성들이 생명을 사랑하도록, 거룩하고 정결해 지도록, 새로운 하와이신 성모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도와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잉태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의 예언자들은 그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못 낳는 여성들의 영혼의 태를 열어서 말씀을 새롭게 잉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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