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항상 존재하는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거기까지는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언제나 '모자람'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기초적인 상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그릇된 신심 행위입니다. 즉, 우리가 모자라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면서 지나치게 과중한 심적 부담감을 야기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충분히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책임있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더한 열성을 내도록 강요하면서 결국 자신들이 주창하는 신심 행위에 전적으로 빠져들도록 만들어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으니 바로 '부자됨'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를 채찍질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벌어도 벌어도 항상 뭔가 부족한 듯이 느껴지도 항상 나보다 더 '잘 사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내가 가난하고 부족하다고만 생각하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 자체가 이미 잘 살고 있고 충분히 인간으로서 존엄한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비슷한 일이 '영성'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라선 계단보다 항상 한 걸음 정도만 더 높이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마음만 지니고 있어도 충분합니다. 헌데 그릇된 형태의 신심은 우리에게 긴박감을 조성하고 우리가 하는 노력 자체를 부족함으로 치부하면서 지나치게 무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신심활동 단체에서도 때로 발견되는 오류이지만 그래도 지도 신부님이 계시고 교회와 연계를 맺고 있는 단체는 아무래도 심각한 오류에 빠져들기는 힘든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독' 하에 이루어지는 신심이 아닌 평신도의 열성으로 특정 책자로 이루어지는 기도 모임이나 신심활동은 때로 심각한 오류로 신자들을 이끌어갑니다.
사람은 언제나 '균형'을 올바로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심은 일상을 거룩하게 이끌어가기 위함이지 신심에 빠져 허우적대기 위함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두려움을 조장하면서 신심에 참여하도록 이끈다면 필시 거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직감해야 합니다. 그런 류의 거짓된 활동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다고 해서 '하느님'이라는 같은 호칭을 쓴다고 해서 모두가 용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교도권의 올바른 감독 하에 식별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신심 활동이라야 바람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닥치는 대로 성령을 부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안수하는 이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성이 뛰어났지만 항상 사도단의 결정을 존중했습니다.
주변의 열심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주임 신부님 몰래 어떤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그릇된 신앙의 표현이 됩니다. 속지 마십시오. 교회의 구성원들은 필시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교회에 허락된 가르침의 권한 자체가 파기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신뢰하고 더디더라도 천천히 안정적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주변에 사건과 사고들이 갈수록 눈에 띄게 증가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두려움이 되지는 않도록 차분하고 성실하게 생활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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