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지역의 야경 |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은 당대 문화와 신앙의 핵심 지역이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징적인 신앙의 도시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다른 하나는 그곳이야말로 사람들의 추악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예루살렘에 오늘 두 종류의 사람이 모여듭니다. 하나는 바로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동방의 박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곳의 왕좌에 늘 머물고 있던 헤로데 임금과 그 수하들입니다. 한 측은 빛을 따라서 생명을 구하러 왔고 다른 한 측은 그 생명의 빛을 꺼뜨리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살고자 또는 그 삶의 소식을 만방에 전하고자 왔고 다른 하나는 죽이고자 어둠 속에서 계획하려 모여들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순진합니다. 자신들이 누구를 마주하고 있는지 누구에게 길을 묻는지도 모르는 채 순진하게 갈 길을 묻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여기에도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더럽고 추악한 이들을 통해서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이 전해준 정보에 따라 여정을 시작해서 결국 아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반면 헤로데 임금과 그 수하들은 교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면서 그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직접 따라갈 의지도 없고 게으르며 자신들의 꾀를 너무나 신뢰한 나머지 동방의 박사들만 보내면서 돌아올 때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손에 얻는 걸 실패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주 아주 먼 곳에서부터 아기예수님의 흔적을 찾아왔고 그 끈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일당들은 가장 가까이 머무르면서도 그분의 은총에 기뻐하기는 커녕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었습니다.
결국 동방 박사들은 임금에게 자신이 준비할 수 있었던 최고의 예물을 바치고 그보다 더 소중한 은총과 구원을 얻어 돌아갑니다. 반면 헤로데는 일대의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죽여 버리지만 결국 그 영혼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생명을 찾는 이는 그것을 찾아 얻고, 죽음을 찾는 이는 그것을 찾아 얻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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