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루카 5,3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겸손하고 뉘우치는 죄인들과, 자신의 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남을 심판하는 죄인들 뿐입니다. 만일 우리 인류 중에 아주 일부분만 길을 어긋나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면 굳이 인류의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길을 엇나가기 시작했고 그 흐름이 하느님에게서 너무나 멀어져 있었기에 구세주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분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끌어 나간다고 스스로를 과시하는 이들이 있지요. 그들은 스스로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고 따라서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은 주변의 사람들, 특히 잘못한 이들, 죄인들을 비난하는 일입니다.
죄인들의 그릇된 행위를 알아보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이를 식별이라고 하고 분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그들을 비난하고 제외시키고 떼어내어 버리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 한 지체가 아프면 모든 지체가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지고 그 아픈 지체를 보살피고 돕습니다. 다만 그 지체가 더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보여질 때에만 절제를 하지요. 하지만 몸 전체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는 이상은 가능하면 아픔을 견디면서 치유를 시도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소외되고 쓰러져 있는 지체들을 모으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당신이 그런 일을 하는 가운데 정말 못쓰는 지체들이 역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할 마음이 없는 이들, 사랑이 없는 이들, 타인을 심판하는 이들이었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마저도 애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번이 예수님을 시험했고 중상했으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죄악의 잔을 온전히 채우게 되지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훗날에는 모든 것이 뒤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정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죄인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반대로 우리는 하늘나라의 문 앞에서 멈춰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유다도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예수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내세웠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배반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과연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걸어가고 있는 이들,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 삶 속에서는 전혀 엉뚱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한번쯤 반성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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