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구원자이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전혀 다른 사실들이 숨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구하려고 했던 것은 그 지방의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이에게만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영에 들린 이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저 말 한마디로 그 더러운 영을 쫓아보내고 말지요. 그리고 실제적인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납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거나 더러운 영에 들렸다가 구원된 이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마르 5,17)
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 주기를 간청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돼지떼의 죽음’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돼지떼였지 예수님이나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수많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우리는 실상 예수님과 그분의 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돼지떼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신앙의 주제보다 먼저 세상의 주제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한 걱정들이 다 사그라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신앙의 주제로 마음을 돌리지요. 한마디로 신앙은 ‘옵션’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받은 이가 예수님을 따르려 하자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결국 더러운 영에 들렸던 이는 정반대로 ‘선교사’로 변신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장으로 돌아가 사람들 모두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립니다. 이처럼 선교는 물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물을 짓는 문제도 아닙니다. 진정한 선교는 구원을 체험한 이의 부르짖음입니다. 자신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체험한 구원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가장 지독한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빛으로 나아와서 그 기쁨을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멀쩡해 보이던 마을 사람들이 실제로는 가장 심각한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추악해 보이던 이가 훗날 가장 믿음으로 반짝이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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