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일에는 유혹에 관해서 가르쳤습니다. 인간 앞에는 언제나 유혹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유혹은 우리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 다만 우리 안의 욕구와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그 유혹을 선택하게 되고 따라서 죄를 짓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이면에 하느님의 은총도 존재하고 우리의 선택이 그 은총을 향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중립 상태에서 사랑으로 향하거나 어둠으로 향한다는 것, 그래서 절대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고 스스로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등등을 가르쳤지요.
알아들었을지 아닐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일부는 알아 들었을 것이고, 일부는 어리둥절 할 것이고, 또 일부는 아예 관심도 없었겠지요. 그 와중에 또 질겅질겅 보란듯이 껌을 씹고 있는 자매도 있었으니까요.
인간은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용하다거나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에게 좋다는 것을 선별해야 하지요.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고로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누구는 담배도 태우고, 누구는 술도 진탕 퍼마시게 되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최고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건강을 상하게 하고 자신을 조금씩 망가뜨린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욕구가 영혼의 의지적 선택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의지를 육신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마치 운전대를 초등학생에게 넘겨주는 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다가 사고가 나면 후회하는 것이지요.
유혹과 은총은 언제나 우리 앞에 공평하게 놓여져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밀쳐댈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의 욕구와 의지적 선택을 바탕으로 고르는 것이지요. 유치원 아이에게 아무리 가슴이 큰 여자나 멋진 근육을 지닌 남자의 몸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아이는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내면에 욕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지니고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서서히 다른 욕구들을 습득하고 물들어가게 됩니다. 누구는 옷을 좋아하고 누구는 구두를 좋아하고 또 누구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식이지요.
우리의 욕구를 단순화 할 필요가 있고, 또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정보들 안에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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