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아닌 존재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부담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척을 할 수는 있지만 착하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위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한 사람의 위선을 알아챌 만큼 충분히 상대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의 만남으로만 한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 만남이 진득하지 못하고 피상적이며, 그 피상적인 만남 안에서 상대의 위선으로 그릇된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교회 안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 안에서는 ‘착한 사람’이라는 가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다른 것, 즉 약삭빠름, 재치있음, 세상적 실력 등등으로도 얼마든지 승부를 노릴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착함’이 먹혀드는 사회이기 때문에 작정을 하고 사람들에게 착해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려 하고 이런 저런 신학적 지식을 습득하려 하며 교회 내의 유력한 인사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심지어는 가식적인 봉사까지도 하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어느정도 속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그들은 본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다가 훌러덩 벗어 버리는 것과도 같지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저버릴 수 없어서 그가 드러내는 그릇된 행동들이 모두 이유가 있고 원래는 착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녀가 악한 행동을 실제로 저지르고 있는데 원래는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착하지 않은 이를 착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지 않으면 자신의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서로 속이고 속아 넘어갑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지혜가 필요한 이유이지요. 올바로 분별해야 하고 엉뚱한 데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욱 필요한 곳에 전해져야 할 우리의 소중한 것들이 공연히 엉뚱한 곳에 허비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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