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자선, 기도, 단식 - 교회의 전통적인 속죄의 방법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고 그 자유의지를 그릇되이 사용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는 허물이고 상처이고 쓰레기입니다. 따라서 벗어나야 하고 치유 받아야 하고 치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죄는 언제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비단 본인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흔적을 남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속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이지요. 우리가 흠집을 내었으니 그 흠집을 메꾸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한 것을 고스란히 기워 갚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우리는 ‘자선’이라는 행위로 우리가 남긴 흔적을 대신 기워갚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런 자선을 자신의 교만의 기회로 삼습니다. 즉,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한다는 것을 뻐기고 자랑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전혀 자선을 한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한 것입니다. 자신이 베푸는 척을 해서 사람들의 인기와 명예를 대신 사들인 셈이지요. 이러한 자선은 하느님 앞에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참된 자선은 아무도 모르게 실행해야 합니다.

참된 기도라는 행위는 오직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효율성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기도’라는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따로 시간을 내고 노력해서 바치는 기도라는 행위는 오직 하느님을 향한 참된 믿음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 기도도 이용을 합니다. 즉 자신이 대단히 신심있는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보란듯이 기도를 하곤 하지요.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은 셈입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서 바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단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당한 욕구마저도 참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욕구는 그것을 충족 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욕구가 커질수록 우리의 통제력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지요. 따라서 영혼이 육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장 훌륭한 방법이 단식이지요.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것마저도 영혼의 강한 힘으로 제어함으로써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교만은 작용할 수 있으니 자신이 하는 단식을 남들에게 드러내어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교만이라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추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수단들마저 모조리 교만으로 더럽힐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에서 가식과 위선도 나오게 됩니다. 자신을 원래의 존재보다 더 높이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수단은 거룩하게 써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세상의 찌꺼기를 얻으려다가는 거룩한 것을 더럽히게 됩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교회의 참으로 소중한 보물이지만 정반대로 교만한 자선과 위선적인 기도와 가식적인 단식은 교회에 도리어 해가 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