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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이사 58,6-7)

하느님이 즐기는 단식은 소극적이 율법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그분이 즐기는 단식은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것입니다.

불의한 결박과 멍에 줄
무엇보다도 우리는 ‘증오’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결박합니다. 또한 우리의 증오에 사로잡힌 상대자는 거기에서 풀려날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 끈으로 두 손을 묶으면 그것을 풀어 버리면 되지만 마음 속으로 증오에 사로잡히면 나 스스로를 묶어두게 됩니다. 우리는 증오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상대자도 해방해야 합니다.

억압받는 이들과 모든 멍에
약한 이들은 늘 강한 이들의 억압 속에 살아갑니다. 이는 비단 노예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억압은 얼마든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도 이루어집니다. 자녀가 어릴 때에는 부모의 억압 속에 살고, 나아가 자녀가 장성하면 늙은 부모를 억압하곤 합니다. 세상 곳곳에 힘과 권력이 그릇되이 존재하는 곳에는 이러한 종류의 억압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짓누르고 있는 모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굶주린 이
단지 배가 고프다고 굶주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허약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애정에 굶주려 있지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쩌면 내 아내가, 어쩌면 내 남편, 혹은 내 자녀들과 노부모님들이 그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적절한 양식을 공급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
마음 둘 곳이 없어 정처없이 헤메고 다니는 이들을 말합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기댈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성격이 독특하고 모난 사람일수록 홀로 고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이 없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그들의 영혼은 정처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어 그들이 하느님 안에 피신처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헐벗은 사람
옷이 없다고 헐벗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들은 헐벗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입을 옷, 존엄의 옷을 선물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르치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꾸준히 그리스도교적 가치들을 입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영적으로 튼튼해 지는 것을 갑옷으로 무장하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기
세상 사람들은 잠시 만날 수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만날 수 있지요. 하지만 혈육은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혈연 중에 있는 사람이 곤란함을 겪을 때에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도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피로 이어진 관계를 선물하신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주라는 뜻이었습니다. 헌데 이 혈육이 성가시다고 해서, 혈육이 엇나간 길을 간다고 해서 피하여 숨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아니면 도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열심히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신 단식이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잠시 끊는다고 단식이 아니지요. 참된 단식은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일을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서 기꺼이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위에 언급된 단식 중에 하나를 골라서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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