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1) 공격성
예수님은 아무런 그릇된 의지 없이 배에서 내리기만 하셨는데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그분에게 마주 다가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공격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특히나 선하고 정의롭고 거룩하고 진실한 것을 보면 괜히 짜증이 나고 가서 공격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2) 무덤에서 살기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머무르던 곳은 무덤입니다.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무덤들이 많습니다. 즉, 육신이 죽어서 묻히는 무덤보다도 영이 죽은 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많습니다. 불륜과 죄악이 가득한 만취하는 술자리나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한 모임과 같은 곳입니다. 더러운 영이 사는 곳은 바로 그러한 곳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적인 수다의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허영심에 부풀어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상대를 시기하고 깔보고 무시하기 시작한다면 커피 한 잔을 놓고 모인 우리들이지만 우리의 모임은 ‘무덤’이 될 수 있습니다.
3) 족쇄와 쇠사슬 끊기
더러운 영에 들린 이는 모든 구속을 부수어 버립니다. 그 어떤 규율이나 규정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우수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모든 규정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신앙의 유상, 계명, 순종, 순명과 같은 덕목은 구시대의 유물이고 오직 반항과 파괴만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바가 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그 어떤 규정에도 반발하고 뛰쳐 나오기가 일쑤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형성하게 된 교회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4) 소리지름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소음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 소음이야말로 그가 가장 즐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침묵 속에서는 언제나 양심이 아파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시끄러운 음악을 들어야 하고, 언제나 군중 속에 파묻혀 있어야 하고,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침묵, 고독, 기도… 그러한 것들은 그를 질식시키는 것들입니다. 언제나 바쁘게 정보를 찾아 헤메고 쓸데없는 정보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서로 웃고 떠들지만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5) 돌로 제 몸을 치기(자학)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자신을 괴롭게 만듭니다. 물론 스스로 하는 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괴로움은 여전히 괴로운 것입니다. 남을 욕하고 비난하고 그 비난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에 괴로워 하면서도 또다시 남을 욕하고 비난합니다. 과한 음식으로 제 몸을 망치고 건강이 위태로워지면 후회하지만 조금이라도 다시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합니다. 그는 육적, 정신적, 영적으로 자신을 가혹하게 다룹니다. 그러면서 휴식과 안식이 없다고 또 자신을 비난하고 한탄합니다.
현대 사회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도 얼마든지 자신을 숨기고 살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오히려 장애인 시설의 지체 장애아들이 영적으로는 더 깨끗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런 이들을 따로 가두어 놓고 우리끼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에는 이미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도 있고, 심각하게 더러운 영이 되어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러나 과학의 시대라 사람들은 먼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 약물을 처방 받지요. 실제로 아픈 것은 영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정신의 탓으로 돌리고 환경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영은 더욱 더 망가져만 가는 것이지요.
여전히 더러운 영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단 한 마디 말이면 회복될 것을 스스로를 과신하는 탓에 오히려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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