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35)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슴 시린 예언을 듣게 됩니다. 아기로 인해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지요. 아기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기다리던 대상일진데 왜 어머니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일까요?
어머니들에게 묻겠습니다.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녀들이 고통을 당할때입니다. 어머니들 가운데에는 자녀들이 고통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어머니도 많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이고 ‘모성애’인 것입니다.
그럼 그 자녀는 왜 고통을 당할까요? 그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오르면 어둠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어둠은 빛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어느 교리교사회가 늘 2차가 진탕 마셔대는 술자리로 끝이 나는데 한 신입 교사가 그 모습에 실망을 하고 전체 앞에서 앞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나머지 선배 교사들이 그 신입 교사의 의견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받아들이게 될까요? 아니면 그 신입 교사가 못 견디고 나가도록 뒤에서 은근히 압박을 가할까요? 차마 보좌 신부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못하고 자기들끼리 작당을 해서 그 신입 교사가 견디지 못할 분위기를 조성해서 제 발로 나가게 만들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세상 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고 사전에 경고된 일이기도 합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이들을 쓰러지게 하고 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쁜 마음을 지니고 있던 이들을 쓰러뜨리고 신음하던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를 통해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마음 속에 숨겨 두었던 은밀한 생각들이 모조리 드러나게 됩니다. 밝은 생각도 어두운 생각도 모조리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더욱더 고통당하게 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특히나 악한 의도가 가득한 사람은 가장 극심한 복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일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요. 하지만 정의의 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마지막은 영광이지만 그 영광은 그냥 손쉽게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극심한 수난과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그저 장및빛으로 가득한 길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 길은 고난, 고독, 수난으로 가득한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희망’이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기쁨에 차게 합니다. 여러분의 길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여러분의 희망도 더욱 커지게 됩니다. 세상에 그 어떤 누구도 보이는 것을 희망하지는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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