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수난에 대해서 잘 알고 그것을 기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첫 발걸음은 무언가 인간적인 좋은 것이 계기가 됩니다. 좋은 교우 관계, 연도 예절, 마음의 평화와 안식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아름다운 이미지 등등이 계기가 되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환상이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치워지고 본질적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약점이 많은 사람들, 심지어 마음이 엇나가고 독선적이고 교만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교회라는 것이 천사들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거의 모든 곳에서 비슷하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환상적일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이 정작 현실을 체험하고 실망한다던가, 대기업에만 들어가면 만사 땡일줄 알았던 이가 들어가서 벌어지는 여러 현실들 앞에서 좌절한다던가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지요.
하지만 특히 교회의 현실은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세상의 것과는 조금은 다른 기대감을 지니고 들어오니까요. 그래서 그 실망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아예 발을 끊어 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첫 환상을 깨고 나서도 교회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교회의 영적 보화를 누리고 또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둠의 시련들을 참아 견딥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마태 20,18-19)
예수님은 당신이 곱게 살다가 세상의 온갖 영화를 입고 때가 되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지상에서는 온갖 수모를 당하고 죽임까지 당할 거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이런 당신을 ‘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도대체 무슨 이런 길이 있느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이 길이 아니고서 무엇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상처가 곪아서 터지고 있는데 살을 찢는 고통이 없이 무엇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듣고도 그분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철없는 청원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청원도 받아들여 그들이 그 잔을 나누어 마시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수락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의 철없는 청원은 예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집니다.
남은 일은 인내로이 달릴 길을 다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마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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