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비’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보듬어주는 아버지를 연상합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 곧잘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회개’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받는’ 데에 익숙해서 우리가 ‘내어주는’ 부분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아버지의 자비와 당신의 모든 선물은 우리에게 선사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자비를 얻기 위해서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이런 신앙인들을 만나곤 합니다.
“하느님은 다 용서하시잖아요?”
한편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그 말이 맞는 이유는 우리가 어떠한 큰 죄악 중에 있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하느님에게로 돌이키면 하느님은 그 모든 어두움을 없애 주신다는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만일 이 표현이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결국에는 당신의 나라에 절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표현이라면 틀린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을 만들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원의 선물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선물되는, 수여되는 것입니다. 영원의 행복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행복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하느님을 향한 방향과 그것을 거부하는 방향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아무리 하느님이 영원의 행복을 쏟아 주시려 해도 우리측에서 철저하게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의심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자유로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향해서 살아가지만 죽음을 거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죽고 나면 사랑을 실천하려고 해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재료가 없고, 덕을 쌓으려 해도 덕을 쌓을 수 있는 재료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마음 속에 숨어 있던 본래의 성질이 그때에는 모든 위선의 가면이 벗겨짐과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의 내면에 존재하던 근본적인 방향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비록 부족하고 못나고 나약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그 내면에 선한 의도가 사라지지 않은 사람과, 반대로 겉으로는 멀쩔한 척 하고 잘난척을 하고 살았지만 내면에 시커먼 악한 의도가 잔뜩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빨래에 남은 물방울을 털어내듯이 남아 있는 서로 반대 방향의 잔존물들을 털어내고 나면 순수한 선, 혹은 순수한 악의 상태로 변질되어 영원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저 역시 지상의 한 인간인지라 이에 대해서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내용들이 성경의 각 부분과 복음서 안에 얼마든지 다양한 양식으로 기술되어 있지요.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쏟아 부으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손에 그것을 받을 그릇이 없다면, 우리가 그릇에 뚜껑을 덮어놓고 있다면, 아니, 아예 그릇을 뒤집어 놓았다면 그 자비를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그릇을 올바르게 놓고, 덮힌 뚜껑을 열고, 가능하다면 그릇 주변으로 손을 오무려 더 많은 자비가 그릇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넘쳐 흐르게 받은 그 자비를 연옥 영혼들에게 나누어 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