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신앙과 관련해서 현대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조금 조명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본적인 분별력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더 좋은 걸 취하게 마련이지요. 똥과 먹음직스런 과일을 두고 똥을 선택하여 몸에 바르고 있는 사람은 '정신나간 사람' 말고는 없을 겁니다. 하느님은 분명 좋은 분일진대 왜 우리는 자꾸만 세상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까요? 지금부터 그 원인에 대해서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의
일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건 정말 힘드는 일이고 의미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겨우겨우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누워버릴 테니까요. 먼저 그에게서 원의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고귀한 원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몸에는 좋지만 쓴 약을 먹일 때에는 처음에는 사탕으로 유혹하기부터 하는 게 옳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흥미거리를 지닌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가오려는 원의를 일으키는데 실패한다면 이후의 내용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성숙한 이후에는 이 단 맛을 버릴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것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
빛은 변함없는 빛입니다. 특히나 '하느님'이라는 분은 세상 그 어느 무엇보다도 영원하시고 사랑에 꾸준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빛에 있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그 빛을 수용하는 대상에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제시될 수 있는 문제가 우리의 '눈 멀음'입니다. 장님에게 색깔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인지할 수 있는 감각기능이 없다면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 분이 되고 우리는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더 나은 것을 고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먹음직스런 과일이 있음에도 그것이 투명하여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남은 썩은 과일 중에서 조금 더 나은 걸 취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셈입니다.
신앙이라는 감각
하느님을 인지하게 되는 기초감각은 바로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써만 하느님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이 믿음이 기초할 때에 나머지 모든 감각 기관이 하느님을 찾는 데에 쓰일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이 '신앙' 즉 믿음이 없으면 모든 감각 기관은 오직 세속적인 목적에만 봉사를 하게 됩니다.
미혹
자, 누군가가 신앙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사실 많은 신앙인들은 자신의 세례를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지속됩니다. 우리는 알고 배우고 믿기 시작하는 하느님보다 여전히 세상 것들에 마음을 많이 빼앗깁니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걸까요? 바로 어둠의 영들의 활동입니다. 이 존재들은 우리에게 '거짓 정보'를 많이 흘립니다.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려는 이들을 좌절시키고 그들에게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불어 넣습니다. 이제 갓 기도를 시작한 이에게 엄청난 기도양을 부과해서 좌절 시키기도 하고, 우리의 보상이 영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게 하고 현세에서 본전을 챙길 생각을 불어 넣는 것이지요. 거기다 눈 앞에 자꾸 비춰지는 교회의 오류들을 드러내면서 전체 교회를 의심하게 만들고, 고통의 문제를 처참하게 내비추면서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눈멀게 합니다. 이런 이물질들이 신앙생활 초기부터 자꾸만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고 올바른 빛을 쪼이지 못하게 하는 셈입니다.
육의 한계
뿐만 아닙니다. 우리 육신은 하느님이 선물하신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참으로 나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때로 병이 들거나 정서적으로 우울해지거나 하면 우리의 신앙도 덩달아 흐릿해지곤 합니다. 정말 투철한 훈련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몸이 극도로 쇠약하고 아픈데 쉽사리 하느님을 상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서적인 약점도 여기에서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겪은 모종의 상처들은 우리 일생을 두고 꾸준히 우리를 괴롭힙니다. 각 사람마다 그런 부분이 다르게 마련인데 누군가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어하는 반면 누군가는 사람들에게서 애정을 기다립니다. 이런 것들 중의 상당수는 어린 시절의 부모로부터 받은 애정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쌓인 것이기도 한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약점으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둠의 영은 물리치고 약함은 극복해야 합니다." 죄가 있다면 속히 뉘우치고 고해성사로 끊어 버리는 것이 좋고, 그 밖에 일상 안에서 드러나는 약점들에 주목해서 그런 어두움들을 하나씩 훈련하고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예컨대 제가 처음 볼리비아에 왔을 때에 사람들은 저를 두고 '치노'라고 놀려대었습니다. 한국말로 치면 '떼놈(중국놈)'이라는 뜻이지요. 처음에는 그게 거슬리고 화도 났지만 살아가면서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되고, 또 익숙해지기도 해서 이제는 아예 제가 나서서 강론 때에 농담처럼 ‘저는 눈도 작고 해서 치노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도구로 쓰기도 합니다.
완벽은 없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 중에 늘 생각하셔야 할 것이,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이 완벽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그 완벽이 모든 것에서 온전히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까지도 지닌 채로 완벽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죄' 하나 만큼은 짓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뼛속까지 깊이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벽'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쓰러짐' 마저도 끌어안으려는 넉넉한 마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어 '온전'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물론 그런 때 마저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언제나 '죄인'으로 인식하고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그릇된 모습 - 소극
자신의 신앙은 자신이 찾아 나가는 거라며 주변 사람들 앞에서 종교적인 느낌을 주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면 나도 너희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빛은 숨길 수 없고 등불은 등경 위에 올려 놓아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원천이 신앙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 되어야 하겠지요. 많은 이들이 껍데기 신앙을 살고 힘겨워하고 좌절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신앙의 그릇된 모습 - 강요
반대로 소위 열심하다는 분들 중에는 조심하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신앙의 여러 보화들을 ‘경쟁의 수단’으로 삼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타인의 신앙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짐짓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인에게 곧잘 개입하고 강압하기 일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자신만의 이상향’을 품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이들입니다. 신앙은 결코 재고 자시고 하는 ‘경쟁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경쟁하는 순간 이미 본인의 신앙은 바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건 ‘교만’이라는 텃밭에서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각자는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신앙의 길을 찾아 나가게 되어 있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로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간직한 신앙의 보물을 기쁘게 살고, 타인에게 소개하며 그들에게 힘이 갖춰질 때까지 열심히 돕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좋은 분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분이 없을 정도로 가장 좋은 분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마땅히 하느님을 향해 이루어져야 하지요. 그러니 우리의 믿음의 눈을 뜨고 우리의 눈앞을 가리는 것들을 치워 버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미혹과 약점을 걷어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감격해 하겠지요. 마치 제가 지금 마당에서 햇볕을 쪼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예요. ㅎㅎㅎ
오늘도 축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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