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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이해하기



시편을 나름 '연구' 중입니다. '묵상'한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네요. 시편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뚜렷하게 등장하고 그 운명이 서술됩니다. 의인은 정해진 상급을 받고 악인은 멸망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서술됩니다.

헌데 선은 악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선은 파괴하거나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완성하고 돕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선의 내면에는 '정의'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의가 바로 악인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정의'라는 것이 적용되면 악인은 자신이 저지른 악을 되받게 됩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바로 악인이 날을 세운 그 칼로 스스로 망한다는 전개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칼은 자기들 가슴을 꿰찌르고" (시편 37,15)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되어주는 그 되로 되받는다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될 벌도 상도 모두 우리가 현재 행하는 것들의 결과물들일 뿐입니다.

지금은 좀 힘들어도 악을 견디고 악에 악으로 맞서지 않고 도리어 자비를 베풀고 축복을 빌어 주고 기도해 준다면 우리가 베푼 선은 고스란히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다시 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현세에서는 상당히 손해를 보는 느낌이겠지만 결코 손해일 수가 없는 것이 시편 안에서는 '영원' 안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아무리 활개를 치더라도 금방 사라질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영원에 비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악인이 100세를 살면서 세속적인 온갖 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국 죽고 나면 멸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악인은 없어지리라." (시편 37,10)

시편을 읽는 방법은 바로 그 초월성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지 않고서는 시편은 아리송한 구절들로 잔뜩 이루어진 허무맹랑한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드높여서 하느님 가까이 두면 시편은 의인에게는 희망을, 그리고 악인에게는 경고를 제시하는 아름다운 영적인 글이 됩니다.

물론 악인들은 시편을 읽지 않겠지만 말이지요.

댓글

정경분님의 메시지…
신부님 제 내면의 양면을 보았습니다.무관심입니다.지난 화요일 함께 일하는 동료가 다치지는 않았지만 사고를 당했습니다.평소에 다른 사람 같으면 오지랍 넓게 나서서 돌봐 줬을 건데 그 자매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이 쓰여지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늦게까지 교육이 끝나고 사장님께서 같이 가라고 하셨지만 그러고 싶지않아 바쁘다면서 먼저와 버렸습니다.평소와는 다른 저를 돌아 봤습니다.10여년을 넘게 그 자매에게 무시당한 저 자신이 그에 대한 무관심으로 바껴있었습니다.용서의 기도와 축복의 기도를 했지만 그마음이 선뜻 열려 지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회개를 위한 축복으로 마련해 주신 일임에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상반되는 무관심의 벽이 있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무관심 했던 일에 대해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하겠지요?
여쭤봅니다.
娟yi님의 메시지…
감사합니다^^시편을 가까이 하고 싶었는데..신부님 덕분에 좀더 편하게 함께 할 수있을거 같아요~감사합니다♡
娟yi님의 메시지…
감사합니다^^신부님 덕분에 시편을 좀 더 가까이 할 수있을거 같습니다^^"기쁨으로"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감사해요^^♡
정경분님의 메시지…
제가 악인이었을때 시편을 처음 대했을 때는 두려움에 계속 읽지 못하고 건너 뛰고 성경을 읽었습니다.그러나 요즘 선에 가까와 지려지려 노력 하며 읽으니 속 시원 하고 명쾌하고 또 때로는 마음 속 깊이 아려 오기도 합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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