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세상에는 부당한 고통이 없어야 한다."
하느님은 선하다.
부당한 고통은 악이다.
선한 하느님은 악한 것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고 즉시 심판하고 없애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는 이들의 논지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당한 고통'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느끼는 '부당하다' '정당하다'라는 기준점 자체도 근거를 상실하게 됩니다.
톱니바퀴가 한바퀴 돌아서 다른 톱니바퀴를 회전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하거나 부당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냥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일 뿐입니다. 신이 존재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에게 남은 세상이라는 것은 그저 자연 발생적인 우연한 사건의 모음이고 그렇다면 더더욱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부당한 고통'에 대해서 그 '부당성'을 주장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모순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결국 신이 존재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느끼는 바입니다. 즉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서 그것이 옳은 것으로 보이면 좋고 선한 것이고 그것이 그릇된 것으로 보이면 나쁘고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자신에게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신에 대해서 부당하고 나쁘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스스로 결론 내린 것에 불과합니다. 즉 모든 기준점이 자기 자신이 됩니다.
헌데 그 기준점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한국은 우리 나라라서 한국에 대응하는 모든 나라는 나쁜 나라가 되는데 반대편으로 보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국이 일본과 맞대응을 하고 있다면 한국의 의견은 한국 사람에게는 선이 되지만 반대로 일본 사람에게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 안에서는 끊임없는 다툼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선'의 방향성이 필요하고 모두가 마음을 모아 그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올바른 방향성은 세상의 진정한 주인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바로 그 기준점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분별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선하십니다. 그 첫번째 전제는 엄연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고통이 현실적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거쳐가야 하는 과정에 있는 단계로서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이 온전히 실현될 새로운 나라가 도래합니다. 그것이 우리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닌 이들, 즉 현실 안에만 희망을 두지 않고 영원을 직감하는 이들은 이에 대해서 성찰하고 묵상하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현실이 마지막 최종 선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 현실에서 부당함을 겪은 이들도 정의를 회복하게 되고 반대로 이 현실에서 부당함을 실천하면서도 승승장구하는 이들도 언젠가는 끝을 마주하게 되고 그들이 행한 모든 악에 대한 올바른 갚음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보여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면 믿겠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보여줄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체적인 믿음의 실천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바를 성실히 꾸준히 살아 나감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도래를 직접 목격한 사람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어떤 희망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에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랑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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