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교사의 의도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더 능력있는 이가 덜 능력있는 이의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상대가 그만한 실력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헌데 지금 한낱 교만에 사로잡힌 이가 하느님의 외아들을 시험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비유 앞에서 말문이 막히게 된 율법 교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율법 교사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와 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즉, 내가 가진 합리적 사고에 하느님이 들어오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일쑤입니다. 나는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런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느님은 과연 그렇게 '실천'하시는지 시험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한 결과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 다루듯 하고 실망하고 맙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정당하다고 우겨대고 싶어합니다. 비슷한 인물로 '욥'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억울함에 대해서 하느님이 동조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욥 앞에서 당신의 무한한 권능을 드러낼 뿐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 안에서 오직 정의로운 분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 앞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정당하고자 한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수용하고 실천할 때에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강도 당한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골목골목을 찾아 다니면서 이 강도 당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도 당한 사람을 이웃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만한 확률로 일어날까요?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처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강도 당한 이가 '초주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 살려달라는 의사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거래를 해서라도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두번째로 복음서가 일부러 '사제'와 '레위인'을 갖다 놓은 이유는 이들이 지닌 직분이 외적으로도 '거룩함'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갖는 위치는 '하느님과 친한 이들'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과 친한 이들은 강도 당한 이의 필요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거룩함의 외적인 지표는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저 겉으로만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을 뿐 그들은 사실 하느님과 친근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이를 통칭합니다. 거룩함은 커녕 유대인의 원수로 인식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강도 당한 이의 필요를 알아보는 시선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필요를 인식한 이후로 거침없이 행동합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성당에서 '초주검'인 상태인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어떤 '필요'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건 성당에 쓰지도 않을 돈꾸러미를 쌓아놓고 더 많은 행사를 만들어 심심한 사람들을 재밌게 해 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아프다고 표현하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일까요?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자비'입니다. 그저 허울 좋은 선해 보이는 활동이 아니라 영혼이 죽어있는 이들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저 겉으로만 선해 보이는 활동에 열중하면서 정작 '초주검'이 된 영혼들을 외면하는 수많은 사제와 레위인들이 성당에 다니고 있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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