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의 아들, 어느 지역 사람, 어느 학교 출신 등등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는 통에 그 사람의 내면의 본질은 흔히 감춰집니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믿었더니 뒷통수를 얻어 맞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하찮은 곳 출신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면이 튼실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은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영혼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와 예언자의 신원을 알아보는 것은 사실상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 혹은 관점은 훈련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칼날을 벼리면 더 섬세하고도 예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시선도 더 깊은 곳을 파고드는 훈련을 통해서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1-12)
사람들은 엘리야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르쳐지지 않았고 또 근본적으로 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납니다.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친구보다 꾸준하고 성실한 친구가 더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에 달디 단 말을 쏟아내는 이를 흔히 더 쉽게 사랑해 버립니다. 그러나 내면의 충실이 없는 그들은 지금은 단 말을 꺼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쓴 말도 잔뜩 쏟아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메시아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품고 사는 예언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런 이들을 '함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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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우 요셉신부님과 복돌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