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 가기 전 한 당돌한 청년이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정말 행복해요?"
그 질문을 받고는 저는 순간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 사람들 앞에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저였지만 정작 저 자신이 정말 행복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제 마음 속에는 온갖 종류의 정화되지 않은 욕구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미 선교를 마치고 그 친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그때 한 질문에 대해서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는 행복해."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기준점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자녀'라는 행복이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위해서 나날이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삶의 기초에서 나오는 행복이었습니다. 그건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인 남미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행복이었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가난한 음식을 즐기면서도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난했기에 그 행복의 진실성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용서'받습니다. 단순히 '용서'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생명은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용서를 넘어선 구체적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반면 그녀를 돌로 치려던 이들은 여러 면에서 불행합니다. 그들은 돌을 내려놓고 집에 가서도 불행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모두 실패하고 나서 어쩌면 더욱 분노에 차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여인을 심판하고자 했고 나아가 예수님을 모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악행을 잠시 멈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행복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분의 은총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더 맛난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에 구경을 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이 행복은 갖은 시련 속에서도 유지되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하느님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것을 하거나 손에 쥐어서'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은 항상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언제나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는 순간 채워져야 하는 행복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머지 않아 새로운 욕구를 키워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한 의미의 행복을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공허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정말 착해서 선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면적으로는 전혀 착하지 않지만 착한 척을 해서 얻어지는 이득이 좋아서 위선을 떨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추구하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그것을 즐기는 이는 그것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 어린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 버릴 존재이지만 하느님은 영원히 계실 분이시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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