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월요일 복음 중에서)
표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것은 그 내면에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의미야말로 진정한 진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돈을 버는 것을 멋진 일로 치부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정말 성실한 사람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그 과업을 이루어 낼 수도 있고 정반대로 온갖 편법과 거짓으로 원래는 쌓이면 안되는 이득을 취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외견을 지녔다고, 사제복을 입고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모두 자동으로 거룩하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미 신자들은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지만 뒤에서 수근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솔한 삶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고 언제나 속으로 되뇌이는 것을 꺼낼 뿐이니까요. 교회 가까이 살기만 한다고 해서 거룩해질 것 같으면 성당 주변의 모든 상점들의 주인들은 거룩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 환경이 열악한 곳일수록 오히려 그들의 신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성당에 와서 얻을 것도 없고 누릴 것도 없는 곳이라면 그들이 오는 이유는 오히려 진정한 신앙의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와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도 있고 재산도 벌어들일 수 있고 정치적 세력도 규합할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의 내면에 진정한 신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성당에 즐겁게 오던 이유를 없애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당만 오면 술판을 벌일 수 있고 고스톱을 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서 오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러한 것들이 싹 사라져 버리고 나서도 계속 자신의 신앙적 충실도를 드러낼 수 있을까요? 바로 거기에 '내면의 진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징은 거기에 존재합니다. 어떤 일의 속깊은 내적 이유, 그것이 표징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기한 기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끊임없는 노력 속에 진정한 표징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은 빵을 배불리 먹기 위해 그분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영혼, 빛이 없는 영혼이 안타까워서 표징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말씀이었습니다. 썩을 양식을 찾지 말라는 말씀, 영원한 생명을 찾으라는 말씀이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표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은 스스로를 눈멀게 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 있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표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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