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본적인 신뢰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카페에 가방을 두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정도는 한국의 기본적인 신뢰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한국을 벗어나서는 결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런 '교양'에서 나오는 상호간의 신뢰와 얕은 친교에서 나오는 신뢰는 엄연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의 신뢰는 '상호신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한계를 지니고 있고 자신이 설정한 한계치를 벗어나면 쉽게 수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해줄거야 하고 생각한 친구에게서 부탁을 거절당할 때에 우리는 배신감을 느끼곤 하지만 실은 그 정도의 신뢰 관계가 구축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선이 상대에게는 이미 선을 넘은 것이 되는 셈이지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성실성과 진실함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이라서 남은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는 만큼 하느님의 신뢰를 퍼내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역에서 실패를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그래서 신앙 안에서 진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은 서로 간에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혼인성사'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많이 엇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와 두려움을 지닌 이는 결코 그분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닌 두 사람의 혼인은 나날이 단단하게 결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관계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즉, 신앙이 없는 껍데기 신자들이 교회의 사회적인 면을 이용하기 위해서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외적으로' 거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신자라면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제 멋대로 해버리고 맙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의 가르침도 존중할 마음이 없이 다른 세상의 부부와 전혀 차별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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