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어그램 대 가톨릭 교회
릭 케파트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의 여러가지 것들을 닮아가는 것은 꽤나 일반적인 일이다. 그리스도교계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있어왔다. 실례로 "Easter"(부활절)라는 단어는 이교도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 다른 종교의 것들을 취하고 그리스도교화 하는 것은 유용한 일이고 다양성을 더하는 건강한 일이다.
다른 종교가 가톨릭에서 요소를 취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도 있었다. 부두교가 그렇게 했다. 가톨릭을 아프리카 민간 신앙과 뒤섞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해가 없는 예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가 가톨릭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가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취해서 선한 이들을 기만하고 속여서 그들의 종교로 끌어 들이려는 노력이 있을 때도 있다.
뉴에이지가 이런 일을 한다. 마녀들을 시중드는 영들은 전통적으로 검은 고양이였으며 "정령(심부름 마귀)"으로 불리어왔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은 고양이 대신에 날개와 긴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의 정령의 사진을 두고 "정령"이라 부르지 않고 "천사"라고 부르면 가톨릭 신자들은 속아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는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서 수정 피라미드를 쓴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멍청한 신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테지만, 수정을 대신해서 루르드의 물병으로 바꾸어 버리게 되면 즉시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을 얻게 된다. 훌륭한 가톨릭 신자들은 천사와 루르드, 또는 창조나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이야기할 때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의미하는 내용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뉴에이지 종교 시스템 안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가톨릭 신자들이, 심지어 사제들까지도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적 설명이다. 때로는 그렇게 된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
수피교
애니어그램은 비록 수피신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수피교에서 개발된 것이다. 애니어그램은 한 러시아인, 조지 이바노비치 굴디예프에 의해서 서방 세계에 소개되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하길 바랬다. 그것이 후에 몇몇 가톨릭 신자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애니어그램은 칠레에서 개발된 것이다.
많은 수피신도들은 마녀와 유사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문을 외울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그들은 그것을 "바라카"를 투사한다고 불렀다). 또한 시간을 지나 과거와 미래를 여행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치유, 마음 읽기, 텔레파시로 서로 이야기하기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특정 요소(어떤 사탕이나 꽃들)가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미신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 투시력과 초감각은 삶의 일반적인 부분일 뿐이다.
이 수피교도들은 그들의 힘으로 디자인을 흔들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말하는 '디자인'이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의미한다. 감독하는 하느님이 인류가 진화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오직 수피의 마스터만이 이 비밀스런 디자인에 내밀히 관여하고 있다. 수피교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심오한 지식을 믿는다(그러나 그들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대립을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 숨겨진 디자인 또는 패턴을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다. 인류가 세상 어디에서건 이 디자인을 해치는 일을 할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초자연적 힘을 이용해서 일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피교도들과 프리메이슨 간의 어렴풋한 연계도 존재하다. 왜냐하면 9세기의 수피교도인 둘 눈이 유사한 상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바나인(건축가)의 질서와 관계가 있으며 또한 이는 현대의 프리메이슨 상징물이다.)
애니어그램
수피교도들은 "디자인"(나크시)가 표면적인 것 아래에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표면적인 것은 거짓일 뿐이며 진실은 표면 아래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외면을 투과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진실은 그 외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거기에서 디자인이 발견된다. 이는 특별히 그들 스스로의 외면 근저로 바라보는 것을 포함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진실한 자아"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때에만 그들은 "진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 그에 바탕해서 행동하는 것, 그것이 수피교의 최종 목적이다.
애니어그램은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1에서 9까지의 숫자를 할당하는 시스템이다. 이 숫자는 그 사람이 행동하는 모든 것의 숨겨진 동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성에는 세 가지의 "중심"이 부여되어 있다. 생각과 감정과 본능이다. 주로는 환경에 의해서, 이 세가지 중심은 언제나 불균형적이다. 이 불균형의 결과는 그 사람의 "진정한 자아"가 "거짓된 자아"아래에 항상 숨겨지게 되는 결과로 드러난다. 애니어그램은 한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행동의 진정한 동기를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고려하고 세상을 다루는 방법을 고려하면서 형성된 환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한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의 진정한 동기를 밝혀내는 것은 수피교도들이 거짓된 외면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봉인되어 있는 것이며 이는 수피교에서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교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이다. 반면 선함과 거룩함, 사랑할 줄 알고 지상의 삶 동안 하느님을 섬길 줄 아는 것, 하느님과 더불어 천국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목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수피 교도들의 목적이 아니다. 만일 악이 디자인의 흔들림으로 인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결국 악은 수피교도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마지막이 언제나 그 의미를 정당화한다고 믿는다. 수피교도들에게는 인간의 발전이 바로서는 것이 선한 행동을 통해서건 악한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건 그 어떤 차이도 없다.
새로운 정의
애니어그램을 활성화 하면서 자신을 알고 다른 이를 안다는 수피교의 목적을 취해서 그리스도교의 목적들을 실행하려고 한다지만 실상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목적들이 수피교의 목적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가톨릭 종교가 애니어그램과 수피교에 혼합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애니어그램을 사용하면서 성인이나 죄, 신앙, 영적 열매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 이러한 단어를 쓰면 적법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이러한 용어만을 애니어그램에 쓸 뿐이고 전혀 다른 정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성인"이라는 단어는 수피교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인다. 거룩함과 연관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피교의 "성인(왈리)"은 진실로 조명된 인물이다. 이러한 의미가 애니어그램에 사용되는 것이다(심지어 가톨릭 신자들에게서도 사용된다). "성인"은 자신의 거짓된 자아를 극복한 인물이고 자신의 진실한 자아를 알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버린다.
"죄"라는 단어가 참으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새로운 정의로 사용된다. 죄는 하느님의 법을 고의로 어기는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사람을 하느님과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갈라놓는 성격적 특질로 재규정된다. 죄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불순한 동기일 뿐이다. 이는 받아들여져야 하고 통제 아래 놓여야 하는 것이다. 애니어그램에 의해서 정의된 숫자는 그 사람의 "근본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것은 항상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 "죄"는 또한 "중독"으로도 불린다.
"원죄"는 아담과 이브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들의 "원죄"는 심리적 조건일 뿐이다. 원죄는 그저 사람이 한 번도 상처받지 않거나 자유로웠던 적이 없으며 항상 해로운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죄는 단순히 지성적 중심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환경의 조건을 서술할 뿐이다.
애니어그램에서 사용된 또다른 용어는 "영의 열매"라는 것이다. 이는 성령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애니어그램에서 영의 열매는 애니어그램의 숫자에 따라서 한 사람이 얻게 되는 좋은 이끌림을 의미한다. "성령"은 애니어그램에 따르면 결코 하나의 위격이 아니다. 애니어그램 영성에서 성령은 "힘"이나 "에너지"와 동의어이다. (우리가 하나의 인격으로 알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달리 개념된다.)
"기도"도 애니어그램에서 언급된다. 그러나 기도의 정의는 하느님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기도는 환경으로부터 요소들을 흡수하는 것이거나 한 사람을 환경에 투사하는 것이거나 '무'에 파고드는 것이다. "구원"은 애니어그램에서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구원은 그저 성숙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성숙이란 한 사람의 "거짓 자아"에서 "참 자아"로 나아가는 해방을 의미한다. 심지어 "천국"조차도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는 그저 한 사람의 거짓 자아에서 참 자아로 해방된 완전함의 상징일 뿐이다.
애니어그램에 따르면 "믿음"과 "순종"이라는 두 단어도 새로운 정의를 지니게 된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한 사람이 의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신앙을 지닐 수 없다. 한 사람은 그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거절하지 않는 이상 진정한 순종에 이를 수 없다. 사실 애니어그램의 순종의 정의에 따르면 반항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종이 된다.
우리 종교의 언어를 차용해서 그들의 의미를 바꾸어 버리는 것은 종교 자체를 변화시키는 격이 된다. 겉으로만 가톨릭 신자일 뿐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교 단어들이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좋아보인다고 자족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고 힘쓰지 않고도 변절로 빠져들게 된다.
R. Kephart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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