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라는 것은 인간이 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 죄를 용서받은 뒤에 남게 되는 벌을 ‘면제’해주는 교회가 허락하는 은총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린 아이가 쓰레기를 버리는 습성이 있는데 자신의 그런 행동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 이미 버려져 있는 쓰레기가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버려진 쓰레기를 다시 치워야 하는데 아이 혼자의 힘으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기에 아이보다 정리정돈과 청소를 잘 하는 어른이 그 아이의 부족한 능력을 보완해서 쓰레기를 치워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아이에게는 뉘우치는 것으로 충분하니 들어가 쉬라고 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의 죄와 관련해서도 일어나는 이런 일을 교회가 ‘대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사에는 벌의 일부를 없애는 ‘한대사’(예를 들어 고해성사를 올바로 보고 포항 흥해성당을 성지순례 하고 정해진 기도를 바치면 주교님이 부여하신 권한으로 한대사를 얻습니다)와 우리가 이맘때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전대사’가 있습니다.
그럼 먼저 가톨릭 사전에 담겨 있는 전대사에 대한 항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죄에 대한 유한(有限)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언제 전대사를 받을지, 혹은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만이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전대사를 주거나, 주지 않는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이 주어지는데, 내적 조건은 “소죄(小罪)를 포함한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고, 외적 조건은 고해성사, 성체배령, 교황이 지시한 기도 등 3가지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고, 만일 어느 하나라도 불충분하다면 한대사(限大赦)밖에 받을 수 없다.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만 주어진다.]
실제 전대사를 은행창구에서 대출 이자를 받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즉 교회가 정한 외적 조건을 이행하기만 하면 절로 그 전대사라는 값비싼 어음을 받는데 그걸 원하면 더 받아내서 마치 내가 그 은총의 주인인 양 다른 필요한 사람에게도 자비로운 척 나눠 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실천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먼저 전대사의 내적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소죄를 포함한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흔히 쉽게 간과되고 그저 고해성사를 슬쩍 보는 것으로 그 조건을 다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대사를 받아서 나눠줄 정도로 내가 교회 안에서 뛰어난 인물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교만이 역으로 생겨날 수도 있는데 스스로를 성인처럼 간주하고 하느님께 ‘외적 조건’만 충당하기만 하면 전대사의 은총이 얼마든지 나온다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교회는 은총의 공로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인들의 통공’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지상 교회는 천상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고 또 연옥 교회를 우리 지상 교회에서 도와줄 수 있다는 개념이지요. 그러나 이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그 모든 은총의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전제 하에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겸손되이 청하되 그것이 마치 우리의 당연한 권리인 양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항상 전대사 기간이 되면 스스로의 내면도 올바로 정돈하지 않은 채로 그저 ‘좋다는 은총’을 얻고자 달려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려고 시도를 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숨어 있는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 사람이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섣불리 짐작하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상황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사전에도 나와 있듯이 정작 우리 자신조차도 그 전대사가 온전히 수여된 것인지 아닌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전대사는 하느님께서 교회의 권위를 통해 허락하는 일종의 관면이지 우리가 조건을 채우고 교회와 하느님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해 드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 전대사를 받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욕심 자체가 전대사를 이루는 근본 자체를 파괴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허락하는 전대사의 기회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그 전대사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영혼의 정화와 성화를 위해서 올바로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스스로가 하느님의 여정 안에서 한걸음씩 걸어가고 있다면 조심스럽게 그 은총을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그 가운데 가장 목마르고 은총이 필요한 영혼을 위해서 봉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겸손이 함께하지 않으면 전대사는 결코 시작될 수도 없습니다.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는 내적 조건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에게 조심스럽게 그 은총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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