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받는 것은 모두 똑같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요. 구원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어차피 하늘나라는 우리가 쌓은 것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선물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따진다면 굳이 선포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선포를 들어서 영원한 나라에 가는 것이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일까요?
먼저 '선포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좀 더 이해한 사람, 주님의 사명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편의성에 따른 삶이 아닌 주님이 의도하시는 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 자연스런 결과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바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사랑하고 즐기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더욱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포하려는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말씀 선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선포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편한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포의 고생스러움을 겪으면서도 그에 대한 열정을 쏟는 것은 그 일이 더 마음에 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에서 더욱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수동적으로 듣고만 있기보다 적극적으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문제는 '선포'하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결과물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분명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그 까닭으로 인해서 선포를 꾸준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수련'을 하게 됩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말하는 '수덕생활'이라는 것이 말씀선포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덕을 실천할 수 있지만 오랜 동안 꾸준히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은 이, 인내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에 항구하고 꾸준하게 머물러 온 이의 내적 힘은 상당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는 흔히 반대가 찾아오고 그것을 이겨내면서도 묵묵하고 꾸준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영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사소한 시련 따위는 어렵지 않게 느끼게 되고 더 큰 도전을 받아들이는 데에 주저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포하는 일을 통해서 그는 더욱 성장하는 사람이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구원'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차등지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한 데나리온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선포에 주력하면 할수록 더욱 안정적으로 그 상급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약한 유리그릇으로 아주 귀한 물건을 다루다가는 행여 그것이 깨어지는 날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물건은 단단하고 안정된 그릇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이라는 것도 그것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지고 나갈 수 있는 올바른 그릇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쁘게 복음을 전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저 앉아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세 번째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런 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결과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적어도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그 복음을 내가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하는 이가 뜻하는 바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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