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지식을 '지혜'라고 부를 때에는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영역과 다른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반면 일상적으로 마주한 문제를 해쳐 나갈 방식은 '요령'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하지요. 그래서 요령을 잘 사용하는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유투브에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지식 정보'들 안에 과연 얼마만한 '지혜'가 녹아들 수 있을까요? 거의 대부분은 일상의 순간적인 곤란을 해결하는 '요령'을 발견할 뿐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지혜, 오랜 기간 영향을 미치며 사람에게 감화를 주는 진정한 지혜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새롭게 일깨워져야 합니다. 한 번 표현되었던 것이 다른 형태로 오늘날 사람들의 이해도에 맞게끔 새롭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지혜야말로 사람을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수난 당하고 죽은 사건은 요령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상의 지식에 밝아서 정치 구조를 알고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반응에 즉각적으로 응답했다면 절대로 십자가에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지혜가 이끄는 방향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알면서도 나아갔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혼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자라는 이에게 묶여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고 나에게 내가 싫어하는 여러가지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영리한 사람들은 결혼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요령'을 많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일까요?
생을 멀리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성가실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꾸준한 사랑으로 바뀔 때 누릴 수 있는 잔잔한 기쁨은 그 삶에 헌신하고 투신하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보상입니다. 사람의 생은 한 단계에서 정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져 나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청년이었던 사람은 중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갑니다. 과연 그러한 때에도 젊은 시절에 어리석어 보이던 '지혜'의 선택이 과연 어리석은 것으로만 남을까요?
신앙인에게는 이 도전이 더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을 살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바탕으로 하는 지금의 지상의 수많은 결정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사용하더라도 충분한 멀쩡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왜 누군가는 '성직'과 '수도생활'에 열중하는 것일까요? 그것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보상이 없으면 없을 수록 사람들의 의문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지혜를 드러내는 방법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죄 아닌 사람이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상함,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약삭빠르고 영리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고 꾸준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느님이라는 분을 신뢰한다며 자신의 생을 헌신하는 사람... 모두 이해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생은 한 순간에 멈추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진리였다는 것이, 곧 '지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영리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를 이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댓글
그런데 저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무한테도 이해받지 못하는 나의 신앙 생활이 힘들었는데,
신부님 강의를 듣고 내가 또라이도 아니고 광신자고 아니고 미친게 아니었다는 거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신앙은, 축복받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려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했던 거 뿐이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신부님을 처음 만나게 해주셔서
저한테는 이제 외롭지 않고 흔들림 없이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신부님 강론을 통해 진정 하느님은 살아계셨음을 확실히 믿게 해 주셨음에 힘을 얻고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어리석은 자부터 되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