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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의 현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인지와 연구는 고대로부터 진행되었지만 근대 심리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적 영역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소하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속깊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서 그에 대한 도움을 받는 일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고해성사'가 있었다.


고해성사는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적 효과 역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내 안에 꽁꽁 숨겨져 있던 비밀스런 일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 해도 사람은 그 일을 다시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죄의 용서'를 확고하게 받으면서 얻게 되는 영혼의 안정과 더불어 심리적 안정이 찾아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 '고해성사'가 너무 형식화되면서 사람들은 그 안의 풍성한 힘을 제대로 체험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당연히 그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에게도 일부분 탓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부드럽고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 당연히 그에게 더 쉽게 다가설 수 있고 여유롭게 속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사 시작 10분 전에 이루어지는 그 짧은 시간에 여유를 기대할 수는 없고 따라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는 짧고 굵게 해야 하는 형식적인 일로 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고해성사를 찾는 신자의 자세와 태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말 진실한 뉘우침을 찾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고해의 본질적 가치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고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적 요소를 얻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신부님을 따로 만날 약속을 한다던지 여유로운 시간을 선택한다던지 하는 수고를 어느 정도는 들여야 한다. 우리는 식당도 예약을 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대를 살고 있다. 헌데 고해성사를 위해서는 그 작은 수고도 하지 않으려고 든다면 거기에는 분명 우리의 탓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해성사는 고백자에게 많은 것이 달려 있다. 고해사제는 최종적으로 그것을 듣고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죄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핵심 직무일 뿐이다. 물론 사제가 더 신경쓰고 정성스럽게 보속을 주고 고해자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파악해 줄 수 있다면 더 큰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사실 고해성사는 고해자가 사제를 찾아오기 이전에 이미 90프로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바른 성찰, 진실한 통회,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그것이다. 죄를 지은 내 마음이 나를 고발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보지도 않은 채로 사제 앞에 와서 알아서 그 더러운 것을 치워달라고 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더러운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않은 채로 더러운 물만 쓸어낸다고 청소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해자는 충분히 스스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죄는 언제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그 죄로 야기된 고통을 올바로 이해하고 아파하는 일이 필요하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은 자신이 어디 넘어져도 아픈 줄도 모르고 비틀거리며 계속 넘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죄의 고통이 심각하고 아프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는 행위이며 진실한 통회가 된다.


나에게 아픔을 가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은 없다. 올바른 통회 뒤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결심'이 따르게 된다.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나 자신의 내면이 심각하게 파괴되는 것을 체험한다면 그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결심할 필요가 있다. 같은 잘못에 빠지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충분히 수정될 수 있고 내가 정신을 차릴 때에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을 공연히 반복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탓이 된다.


이처럼 사제에게 다가와 고해하는 시간이 설령 짧다 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내가 그 이전에 할 수 있는 고해의 준비단계 작업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사전작업을 충실히 한 사람이라면 사제와의 만남의 순간의 길이에 상관없이 고해를 하고 나서 개운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마치 목욕탕에서 충분히 때를 불린 후에 때를 밀면 적은 노력으로도 많은 때를 벗어내고 개운함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보다 친절하고 정성스러운 사제를 만날 때에 더 많은 은총의 체험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핑계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전 작업을 소홀히 한 채로 고해성사를 성의없이 형식적으로 본다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특히나 대형화된 현대 교회에서 사제에게 지나친 시간을 고해성사에 할당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될 수 있다. 이런 교회적 자료들이 충분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고해성사를 올바로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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