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는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에는 여러가지 '근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서 배웁니다. 즉, 뜨거운 게 싫다는 것, 추운 게 싫다는 것은 굳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경험과 체험으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통을 싫어하게 됩니다.
기술도 배웁니다. 하지만 이 기술이라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더라도 똑같은 것입니다. 땅을 파는 기술을 삼촌에게서 배울 수도 있고 할아버지에게 배울 수도 있습니다. 이 기술을 가진 누구라도 전수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기능 교육, 지식 교육도 비슷합니다. 그것을 가진 누구든지 아직 배우지 못한 이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가르침의 수준이 좀 달라질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모르던 것을 배우는 것은 누구에게서든 가능한 일입니다. 도둑도 문 여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고 열쇠공도 문 여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즉,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는 그가 선하고 악하고가 필요 없습니다. 기술만 잘 전해주면 그만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가치'를 배웁니다. 선과 악이 존재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치'는 아무나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가치를 배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한 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항상 진실될 것을 가르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은 진리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 가치는 가르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살지 않으면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실이 다르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그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분류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어떠한 가르침도 전해질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천적으로 '신뢰를 둘 만한 이'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신뢰할 만한 사람인데 거짓된 정보로 그를 향한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고, 정반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그를 멋들어진 사람으로 포장해서 믿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거짓 선동을 당한 나머지 마땅히 믿어야 하는 가치들에서 멀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연출되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별하려고 애를 쓰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운 현실이 눈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가운데 '신앙'이라는 최고의 가치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오직 하나의 목적지와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최고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을 내면에 지닌 이는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 분별하게 되고 그 길을 걸어 나가게 됩니다.
'신앙', '믿음'이라는 영역을 통해서 우리는 현세적 가치를 초월한 가치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바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우리는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을 찾는 이는 길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설령 엇나가더라도 결국 돌아올 곳을 알고 회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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