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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쁨을 찬양하는 시대




우리는 바쁨을 자랑합니다.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여줘야 마치 나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의지대로 시간을 배분할 뿐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환경에서 미친듯이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유롭고 한가한 사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속의 가치를 위해서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저마다의 밭에 뿌리고 거기에서 열매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게임을 한다고 정신없이 바쁘다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피식 비웃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일에 지나치게 헌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의 생을 두고 지나가고 나면 그닥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일에 헌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칠일째 날에 거룩한 휴식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은 결국 영혼을 갉아먹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으며 나의 걸음은 올바른가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정처없이 달리다가 큰 사고가 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를 때에 바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고 그분이 부르실 때에 ‘네’ 하고 응답할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우리 가까이 다가온 구원의 기회를 잃게 될까 걱정입니다.

댓글

고옥숙님의 메시지…
맞습니다
요즘사람들은바쁜것을자랑으로 능력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것 같아요.
가끔 일정표를 보여주며 "이것봐 일정이 꽉찾는데 어쩌나" 하면서
그럴때 저는 확실히 능력없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생각이들기도 했습니다.
과거 직장 동료들 중에는 근무지마다 작은모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만나곤 합니다.
여자들의 만남이란것이 맛집을 찾아다니고, 산책 좀하고, 멋진 카페가서 향기로운 커피 한잔하고 안주거리로는
가족들 이야기나 친구들의 뒷담화죠.
매번 같은 레파토리
저는 언젠가부터 이런 만남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질없는 이야기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농사 같지 않은 농사일로 바쁘기 때문이기도 했답니다

최근에는 90세 노인이 "내가 이렇게 오래 살줄 알았으면 60세에 뭔가 계획하고 시작해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90이 아니라
재수없으면100세를넘길수도있다고하니~
뭔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유튜브 제작과 요양보호사 자격취득에 도전하기로 하였답니다.
저도 2달 동안은 그 바쁜 친구들처럼 자랑할꺼리가 생겼네요!

너무늦게 신앙생활 을 시작한것 같아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신부님같은 멋진분을 만날려고 그랬을것같아요.
신부님의 강론ㆍ강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시리답니다.
신앙생활이 익숙하지 않아 부족함이 많지만 앞으로 신부님말씀 새기면서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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