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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에서 복음 선포자로...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베드로는 일상의 일을 하고 있었다.
헌데 예수님이 와서 사람들에게 뭔가 가르침을 주기 시작했고
베드로 역시도 그 가르침을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그치지 않고
베드로에게 한 가지 일을 제안한다.
베드로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으로서는 약간의 포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전문적으로 하던 어부의 일이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지극히 전문적으로 하던 그 일에서
어부의 자존심을 꺾을 만한 부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았고
예수님의 말을 따랐다.

바로 이 작은 희생이 베드로의 삶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베드로는 상상하지 못한 경이를 겪고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본래의 죄스런 처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다가올 막연한 두려움에 예수님을 거부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도리어 더 큰 사명을 선사한다.
하지만 베드로의 일은 바뀐 것이 없으니
전에는 고기를 낚았으나 이제는 사람을 낚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체험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극히 작은 포기도 주저해버리고 말아서
결국에는 아무것도 체험하는 것이 없게 된다.
우리는 미워하던 사람을 여전히 미워하며
우리는 좋아하던 재화를 여전히 좋아한다.
이런 무미건조함 속에서 그나마 있던 신앙도 사라져가게 된다.

아주 작은 내던짐, 포기가
여러분에게 '경이'를 체험하게 하고
여러분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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