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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복

- 예복은 세례가 아닙니다.

예복도 입지 않아 쫓겨났다는 성경 구절을 풀이하면서 시작한 말입니다.

- 예복은 세례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바라시는 것이 희생이나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단순한 세례 ‘예식’은 예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복은 우리의 낮추어진 마음, 겸허한 마음입니다.

많은 이들이 세례만 받으면, 첫영성체와 견진만 받으면 일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식일 뿐입니다. 그 예식이 진정한 성사가 되려면 우리가 그 예식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단순히 예식을 거행하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세례 증명서만 떼어 가는 셈이지요. 그들은 신앙인의 삶을 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셈이지요.

행여나 아마존 밀림 지역에서 어느 가족이 선교사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서도 절대자이신 신을 섬기고 자기들끼리 서로 돕고 사랑하면서 양심에 따라 살았다고 해 봅시다. 그럼 그 가족이 죽으면 지옥행인가요? 아닙니다. 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가족은 하느님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반대로 세례를 받고 모든 성사 생활을 충실히 하고, 주일 미사도 절대로 거르지 않으면서 늘 앙심을 품고 살아가고 탐욕과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은 그 세례와 철저한 율법 준수 때문에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진정한 예복은 예식이 아니라 우리의 겸허한 마음이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복이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복을 준비하지 않으면 밖으로 쫓겨나 가슴을 치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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