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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이 되는 것



악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실천해야 선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선의 실천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커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성전을 짓는다지만 뒤로 커미션을 다 받아먹고 사람들의 찬사를 즐기며 자신이 남긴 업적으로 더욱 더 오만해지는 사람은 전혀 선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선의 실천은 사람들의 눈에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선한 의지로 한 작은 기도가 어떻게 드러나는 행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육신 하나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은 눈에 드러나는 악행을 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 착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아닙니다. 선을 실천해야 선한 이가 됩니다. 성당 안에서는 활동적이고 모든 궃은 일을 다 떠맡으면서도 정작 가정 안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군으로 군림한다면 그는 전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부님과 가까이 지낸다고 선한 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제직에 걸맞는 선의를 지니고 열성과 봉사하려는 마음과 실천이 그를 선한 이로 만드는 것이지요. 주교님을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선한 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교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도리어 교만의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당을 제대로 꾸미는 것은 얼마나 값비싼 꽃을 쓰는 가가 아니라 어떤 희생과 봉헌의 마음으로 성당을 꾸미는가 하는 것이 더 관건이 됩니다. 제대 위의 꽃을 꾸미는 방식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여 서로 불화하는 자매들이 있다면 그 꽃이 아무리 어려운 방식의 꽃꽂이로 꾸며진다 하더라도 도리어 거룩한 장소를 망치는 행위가 됩니다. 전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 드리기 위한 행위이지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정확하게 법규와 제도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헌데 그런 작은 소홀함에 불같이 화를 낸다면 그건 전례의 본질을 왜곡하고 인간의 제도를 지키려는 헛된 노력에 불과합니다. 수도복을 입는다고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수도자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것이 남들의 주목을 받고, 더 많은 값비싼 식사 초대를 얻기 위함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이미 수도복의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 됩니다. 수도복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봉헌된 사람으로 인식하고 거룩함을 존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신분 상승의 계기가 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역장은 봉사자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 구역의 사람들을 더 잘 알고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구역장인 것이지요. 그저 감투 하나 더 씌워서 변변한 체면을 살리는 것이 구역장이 아닙니다. 공연히 텃세 부리라고 만들어진 직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각 공동체의 회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왕직’은 바로 ‘봉사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발을 씻기신 분이십니다. 발 씻김을 당하라고 보내진 분이 아니시지요. 교회 안에서 어떤 장을 맡게 되는 것은 더 열심히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삶으로써 남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희생과 봉사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지요. 단순히 악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선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을 실천해야 하고, 그 선을 보다 구체적인 장소와 지위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이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24시간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책임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숨어 있는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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