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무관심하다는 평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 관심을 집중하는 대상이 서로 다를 뿐이지요. 봉쇄 수도원의 수녀님은 세상의 소식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수녀님은 ‘무관심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정반대로 그 수녀님은 오히려 세상이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참되고 진정한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흔히 ‘무관심하다’라고 하면서 혹평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나와 세상 사람 대부분이 갖는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갖는 관심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단순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그 일이 정당하고 올바른 일이 되는 것일까요? 또 거기에서 관심을 떼어 두고 자신이 진정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무관심한 것이 되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다른 이들의 윤리성에는 극도로 민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내면의 흐름에는 소홀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남들이 행하는 것에는 엄청난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익명성이라는 도구 덕분입니다. 우리가 주목받지 않은 채로 남에게 어떤 코멘트를 달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아주 자유롭다 못해 무절제한 이야기들을 쏟아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청소를 잘 하자고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 먼저 나 자신의 삶이 공공연히 드러나는 가운데 그런 말을 해야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올바로 살펴보고 난 뒤에 그런 조언을 다른 이들에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남들더러 착해져야 한다고 할 때에는 먼저 우리 내면에 그런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정작 나는 착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가 착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훗날 내가 남들에게 요구한 그만큼 나에게 다시 심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나온 바로 그 말과 그 잣대로 우리를 재어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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