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누구든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려면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요. 누가 가르칠 것이며 누가 배울 것입니까? 기술은 기술자에게 배우는 게 맞습니다. 너도 나도 처음 보는 기기를 앞에 두고 서로를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기술은 그 기술을 습득한 이에게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 걸까요? 그건 성경이 어떤 성격의 책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기술적인 요소를 찾는 사람은 기술적으로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경의 원어(희랍어, 히브리어)를 습득하고 있는지, 혹은 성경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갖추고 있는지 등등을 통해서 성경도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성경을 그렇게 읽는 것, 그렇게 습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것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더러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살기 위해서 받아들이고 읽어야 하는 책인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도와주는 수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워 알게 된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요.
주일 미사에 나가긴 하는데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해서 그 미사가 마냥 지겹기만 한 이들, 교회 봉사 단체에 가입을 해서 봉사를 하긴 하는데 이웃에 대한 사랑이 피어나질 않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인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진실한 체험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배운다고 더 많이 실천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직접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은 승천하셨다는 것이고 이 지상에서 더 이상 인격을 갖추신 예수님을 마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예수님의 발현을 목격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드문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드러내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내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 역할을 하라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은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학술적인 지식을 전파하는 이들이나, 교회적인 기술을 전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생생히 드러내는 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이고 자비의 예수님이며 인내와 관용과 용서의 예수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내면에 수락해야 하고 나아가서 우리 역시도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우리가 와서 보고 타인에게 예수님을 드러내는 이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 교회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빛과 소금을 전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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