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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 존 비 칼훈(John B. Calhoun)


생쥐 실험


1960년대 초, 국립 정신 건강 의회(NIMH) 메릴랜드 풀레즈빌 외각 시골에 자리를 마련한다. 그 연구소는 다양한 연구과제를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칼훈이 주도한 연구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그의 가장 유명한 연구인 쥐 세계 실험이 창조된 곳이었다. 1968년 7월에 네 쌍의 쥐들이 거주지로 들어갔다. 그 거주지는 한 변이 2.7m 크기의 금속 우리였으며 높이는 1.4m 였다. 각각의 면은 수직으로 된 네 개의 금속망 터널이 있었다. 터널은 그들의 둥지 상자와 먹이상자, 식수통을 이어주었다. 먹이나 물, 거주지에 부족함은 없었다. 포식자도 없었다. 유일한 적은 공간의 한계였다.


처음에는 개체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매 55일마다 두배로 뛰었다. 315일째 되는 날 개체수는 620마리가 되었다. 그 뒤로 개체수 증가 추세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매 145일마다 두배가 될 뿐이었다. 600일이 되자 마지막으로 생존하게 된 생쥐가 태어났다. 비록 실험 장치는 둥지를 마련할 공간에 따르면 3840마리의 생쥐가 살 수 있었지만 전개체수는 겨우 2200마리에 불과했다. 315일에서 600일 사이의 기간에 사회 구조와 일반적인 사회적 행동의 붕괴가 관찰되었다. 그들의 행동학적 기행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젖을 떼기도 전에 새끼를 쫓아내 버리고, 새끼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동성애 경향이 증가하고, 능력있는 수컷은 자신의 영역과 암컷을 꾸준히 방어하는 데에 무능해졌으며, 암컷은 흉포해졌고, 무능한 수컷은 소극적으로 변하고 점점 더 방어할 수 없는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600일이 지나자, 사회적 붕괴는 계속되었고 개체수는 멸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암컷은 새끼를 낳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암컷의 짝은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구애를 하고 서로 싸우는 데에 애쓰지 않고, 자신의 건강에 필수적인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자고, 자신을 치장하는 자신만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말끔하고 건강한 털과 상처없는 모습이 이 수컷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놈'으로 불렸다. 피를 흘리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고 행동 패턴이 영구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실험으로 얻게 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여유있는 공간이 점거되고 모든 사회적 역할이 채워지면, 각 개체가 체험한 다툼과 스트레스가 사회적 행동의 완전한 붕괴를 가져오게 된며, 최종적으로 인구가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칼훈은 생쥐 개체수의 운명을 인간의 잠재적인 운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 붕괴를 "두번째 죽음"으로 특정했는데, 이는 계시록 2장 11절에 언급된 "두번째 죽음"을 의미한다. 그의 연구는 작가 빌 퍼킨스에 의해 "점차적으로 인구가 증대되고 비인간적 세상"안에서 살아가는 위험에 대한 경고라고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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