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하는 걸 다른 이들이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으스대고 싶은 것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세상이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세상이야말로 그 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올바로 알아야 세상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세상은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알아야 하는 것, 예수님이 알려 주시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
2.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
첫번째 항목부터 심도깊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살펴보면 됩니다. 우리는 과연 모든 것에 앞서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보다 아버지를, 우리의 가족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단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랑의 대상의 될 수는 없습니다. 길을 벗어나는 이들이 있다면 ‘올바름’ 안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가족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마저도 감싸 안는 걸 그들은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대관계가 튼튼한 시골에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소위 말하는 ‘서로의 뒤를 봐준다’는 언뜻 들으면 상부상조 같은 말마디 속에 때로는 올바르지 않은 일까지도 서로 뒤를 봐주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하느님에게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소유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챙기고 나머지를 운용하고 있을까요? 이 역시 ‘그렇다’ 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챙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렇게 모으고 쌓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접대를 위해서는 펑펑 돈을 쓰는 어리석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두번째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과연 아버지는 무엇을 명령하셨을까요? 아버지는 커다란 성전을 짓기를 바라셨을까요? 아니면 당신의 말씀이 흘러 넘치는 곳을 원하셨을까요? 뭔가 외적으로는 활발히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내면은 점점 썩어가는 곳을 원하실까요? 아니면 겉으로는 고요해 보여도 내면이 충만하기를 바라실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잔뜩 부유해져서 남는 것으로 적선을 하기를 바라실까요? 아니면 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당신께 항상 충실하기를 바라실까요? 이러 저러한 의문을 다 제쳐 두고서라도 과연 아버지의 명령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식별하고 그 뜻을 충실히 살도록 도와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흘러 넘치는 곳은 아버지의 명령이 활성화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령께서 언제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성령과는 상관 없는 일들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오면서 남편과 싸우고 내면으로 원한과 증오에 시달리고 있다면 아무리 미사에 제 시간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건 성령과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예시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멀리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아버지의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명령하신 것을 발견할 수 있고 나아가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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